여자라서 안돼..
실력 마음에 들어하던 면접관 영업 지원하니 "여자는 좀…" 최종 면접마저 못갈땐 한숨만
열정페이만 강요..
어렵게 들어간 회사 매일 야근 실제 시급은 고작 9000원 남짓 결국 1년반뒤 다시 취업전선에
스펙 좋으면 뭐하나..
명문대 출신에 토익은 960점 잠시 일한 곳에선 임금도 체불.. 미래없는 한국, 차라리 해외로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청년들에겐 피할 수 없는 명제가 됐다. 대학시절 내내 바빴고 열심히 지냈다. 학비는 물론이고 생활비까지 마련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형편상 유학이며 해외 어학연수는 미처 꿈꾸지 못했지만 누구나 탐낼 만한 스펙도 갖췄다. 외국 친구들은 서울대를 나왔다고 하면 다소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깜깜한 터널을 얼마나 더 걸어나가면 될까. 지난 22일부터 24일까지 취업 문제로 힘겨워하는 청년 3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 대상자들의 학교·전공·나이 등 인적사항들을 제외하고 이름은 가명으로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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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래서 여자는 안 뽑아"
이지선씨(26·여·가명·한국외국어대 졸업예정자)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지난해 내로라하는 대기업 그룹 최종면접시험장.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했다. 이씨가 프레젠테이션을 하자 그 회사 임원급 면접관들은 "드디어 마음에 드는 지원자가 나타났다"고까지 했다. 면접관들이 지원서를 살펴보는가 싶었다. 갑자기 좋았던 분위기가 차갑게 변했다. "어라, 여자가 영업을 지원하셨네. 여자는 영업에서 안 뽑는데. 그것도 희망근무지를 서울로 찍으셨네. 지방근무는 안한다는 거지."
정적이 흘렀다. 친절하게 웃었던 면접관이 돌변했다. "내가 이래서 여자는 안 뽑아." 그 순간 준비해갔던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뒤엉키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멘붕'이 왔어요. 지원서에는 서울과 지방 둘 중에 한 곳만 클릭하게 돼있었어요. 만일 지방에서 근무해야 한다면 당연히 지방에서도 일하겠다고 표시했을 거예요." 웃음기가 사라진 면접관에게 "(그런 게) 아닙니다"라고 말해봤지만 상황은 이미 끝난 것 같았다.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어요. 첫 최종면접 기회라 떨려서 제대로 말을 못했어요."
지방에서 나고 자란 그는 대학을 서울로 오면서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점은 4.5점 만점에 4.2점을 유지할 정도로 상위권이었고, 토익(TOEIC)과 오픽(OPIc) 등 영어성적은 모두 만점을 받았다. "식당에서 서빙도 하고, 공장에서 휴대폰 조립도 해보고, 도서관 사서에 CF광고 엑스트라로도 출연해 봤어요. 유명 가수 뮤직비디오에도 제 모습이 나와요. 대학생활 내내 정말 안해본 게 없어요." 대견한 딸이었다. 해외로 어학연수를 갈 여건은 안됐다. 동시통역대학원에도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께 부담을 드릴 순 없었다. 죽기살기로 영어를 공부했고 지금은 경찰청에서 외국인 범죄와 관련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영어에 능통하다. 한국사능력시험, 컴퓨터활용능력시험, 한자능력시험 등 각종 잡다한 시험들의 등급도 따놨다. 봉사활동은 물론이고 유명한 외국계 회사에서 인턴 경험도 있다.
대학 8학기를 수료한 지 벌써 2년째다. 영어성적표만 제출하면 졸업장을 받을 수 있지만 이대로 졸업할 순 없다. 2년 동안 100군데 이상 지원했다. 면접기회는 단 네 번만 주어졌다. 백 번 지원이면 아주 많은 건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초조함이 더해질수록 그 장면은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이래서 여자는 안 쓴다"는 말은 그날 가슴에 대못으로 박혔다. 왜 그때 제대로 말하지 못했을까. 남자 동기들 못지않게 얼마나 대견하게 서울살이를 잘 해냈는지를, 어떤 일이든 시켜만 준다면 잘 해낼 수 있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게 내내 마음에 남는다. 다른 대기업 필기시험장에 가봐도 한 반에 여자는 그 혼자인 적도 있었다. '아예 서류단계부터 떨어뜨리는 걸까. 그럼 나는 겨우 그 관문을 통과한 건가.' 안도감도 잠시. "결국 최종합격까지 되는 사람들을 보면 남자가 월등히 많았어요. 어딜 가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 기억을 떨쳐내려고 무진 애썼다. "서류통과는 물론이고 최종면접까지 갈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았어요." 방안에 틀어박혀 혼자 공부만 했다. 어느날 문득 며칠간 누구와도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걸 알게 됐다. 무기력했고 눈물만 났다. 최근 공기업 시험 준비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다시 예전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사기업은 아무래도 여자를 덜 뽑는 것 같아요. 올해는 공기업 시험 준비에 전력을 다할 거예요. 공기업이 그나마 공평한 것 같으니까요. 영어를 활용할 수 있는 공항공사 같은 공기업에 취업하고 싶어요."
"매일매일 힘들죠. 이 생활이 언제 끝날까 불안하죠. 아직도 스펙이 부족한 것 같아서 더 준비는 하고 있는데…끝이 없네요."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희망이 좀 있는 건지 확실히는 모르겠는데요. 정부가 내년에 신규 채용 일자리 몇만개 만들겠다고 했는데…그러면 좀 수월해지지 않겠어요. 내년까지는 해보려고요."
■"시급 9000원이면 알바가 낫겠다는…"
김준호씨(31.남·가명)는 1년 반 전엔 새벽 3~4시께나 잠이 들었다. 서강대를 졸업했다. 한 중견기업에 들어가서 1년가까이 다녔다. 여름은 그나마 괜찮았는데 겨울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해를 보지 못했다. 평일 닷새 중 나흘은 자정 가까이 일했다. 때로 자정을 넘기기도 했다. 주말에도 일했다. 한번은 앉아서 시급을 계산해 봤다.
주말도 반납한 그의 실제 시급은 9000원 남짓이었다. 회사는 1년간 열정페이를 강요했다. 바로 위에 상사들의 삶을 봐도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아르바이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1년간 자정퇴근을 하다 보니 미래 걱정만 없으면 아르바이트족으로 평생 벌어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사표를 쓰겠다고 했다. 고향의 어머니는 "관 뚜껑 짜서 들어가시겠다"면서 완강히 반대했다. 그렇게 2013년 겨울,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얼마 전 통계청이 발표한 청년의 모습이 그와 오버랩됐다. 첫 직장을 잡는 데까지 11개월, 첫 직장 근무기간 평균 1년 반. 그 통계에 그는 얼추 들어갔다. 2014년 1월부터 2015년 6월까지 꼬박 1년6개월 동안 150장의 원서를 냈는데 면접 기회는 열 번도 채 안됐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수중의 돈이 떨어져가니 두려웠다. 궁핍했다. "큰 회사에서 작은 회사로 가면 모를까. 작은 회사에서 큰 회사로 이직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죠…." 그러나 그도 시간이 지날수록 남들이 잘 모르는 기업까지 지원했다. 다행스럽게 1년 반의 터널이 한달 전 끝났다. 최근 지방의 한 공기업에 취업했다. "지금은 만족해요. 돈은 덜 받더라도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김씨는 지난 상반기 취업에 실패했더라면 9급 공무원시험 준비를 했을 것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엔 정말 미래가 없나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재주가 있는 그는 언제나 통통 튀는 존재였다. 학교 축제 땐 행사를 기획했고, 미국 경영전문대학원(MBA) 출신들보다 영어를 잘 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스페인어도 능통하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1년간 해외를 다녀오기도 했다.
"제가 노렸던 목표들은 항상 이뤘어요. 취업도 될 줄 알았어요." 정서윤씨(24·여·가명)는 서울대를 나왔다. 학점이 우수하고, 토익은 한번밖에 안 봤지만 단박에 960점을 받았다. 텝스(TEPS)는 910점이다. "면접은 대여섯 번 정도 봤고, 최종면접까지 간 건 없어요. 사실 제 스펙에서 떨어질지 몰랐어요. 서류에서 엄청 많이 떨어졌어요." 처음에는 또 떨어졌구나. 괜찮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봤지만 자꾸 떨어지다 보니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가 싶었다.
지난 24일 오후 인터뷰에 응한 그는 잠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뱉었다. "대한민국엔 미래가 없어요." 목소리엔 표정이 묻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단호하고 아프게 들렸다. "능력 있는 청년들이 한달에 100만원, 200만원 받으면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까요. 원룸 보증금 구하기도 벅찬데 무슨 꿈을 꿀 수 있겠어요. 제가 죽을 때까지 집 한 채 살 수 있을까요. 어른들은 우리보다 기회가 많았잖아요." 새로운 기회를 잡기가 너무 힘든 세상이다. "정 안되면 해외로 나가고 싶어요. 최대한 빨리 우리나라를 뜨고 싶어요." 주변 친구들도 같은 생각이라고 했다. "너무 똑똑해서 뭘 해도 될 애라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많아요. 그런 애들이 취업이 안된다는 건 국가적 낭비예요."
"대기업, 중견기업 다 좋아요. 작은 회사라도 해외 시장을 노리는 회사나 젊고 혁신적인 기업이라면 가고 싶어요. 제가 영어나 스페인어에 투자했던 노력들이 너무 아까워요." 가고 싶은 회사에 대해 얘기하면서 눈이 빛났다. "전 상경계열을 나왔지만 정보통신(IT) 쪽이나 시스템통합(SI) 기업 기획파트에서 일하고 싶어요. LG CNS 같은 데 보면 콜롬비아 교통카드 시스템 같은 걸 만들었잖아요. 전 분석 프로그램 몇 개 정도는 할 줄 알고, 통계프로그램도 좋아해서 배웠죠."
작은 회사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사실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 같은 기업은 두렵다. 얼마 전 그는 사회적기업에서 잠시 일하면서 임금체불을 겪었다. "40만원 체불됐는데, 달라고 해도 무시하고 주지 않았어요. 고용노동부에 신고한다니까 한 시간 있다가 바로 입금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여기는 신고해야 하는구나 싶었어요." 12시간 매장근무에, 회의준비에 프로젝트까지 기획했다.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서 이런 권리침해가 훨씬 더 많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다만, 힘없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화가 났다. "창조경제며 스타트업 정책으로 나라에서 엄청 돈 대주니까 스타트업 기업들이 생겨나는데, 눈먼돈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아요." 다른 서울대 출신의 친구도 인턴으로 주말도 반납하고 그 회사의 모든 걸 다 맡다시피 했다. 그런데 120만원 주겠다고 했던 사장은 80만원밖에 주지 않았다.
"전 늘 항상 인정받았어요. 대학 내내 제가 돈벌어서 학교 다녔고, 컴퓨터 프로그램도 잘 다루고 영어도 좋아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잘할 것 같은데 어떻게하면 보여줄 수 있을까요."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7일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6개 경제단체장과 함께 민관합동 '청년 고용절벽 해소' 종합대책을 통해 2017년까지 20만개 이상의 일자리 기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대책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겠지만 이것 때문에 청년고용이 많이 늘 것 같지는 않아요. 세제혜택 준다고 해도 기업 입장에서는 큰 돈은 아닐 테고요." 청년고용률은 수년간 정체상태다. 2004년 45% 수준이었던 청년 고용률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2010년 40.3%까지 내려간 뒤 40~41%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안태호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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