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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 칼럼] 무제한 토론은 필리버스터와 다르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3.01 17:05

수정 2016.03.01 17:05

[노동일 칼럼] 무제한 토론은 필리버스터와 다르다

국회에서의 무제한 토론을 지켜보는 내내 마음이 착잡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국회 선진화법의 무제한 토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어디나 흔한 정치의 위선'(워싱턴 프리즘, 2013년 11월 20일자)를 필두로, '담판 정치 대신 토론 정치를'(2015년 12월 9일자), '국회선진화법 사용 설명서'(2016년 1월 20일자) 등 본란에서도 촉구해왔다. 방송에서도 공개적으로 무제한 토론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필리버스터에 관한 논문을 쓰기도 했고, 현재는 필리버스터와 무제한 토론을 비교하는 논문을 준비 중이다.
이를 바탕으로 볼 때 우리 국회에서의 무제한 토론을 필리버스터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사한 면도 있지만 우리의 무제한 토론은 필리버스터와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필리버스터는 미국 상원의 독특한 제도이다. 하원에서는 엄격한 발언시간 제한이 있지만 상원의원의 발언시간은 제한이 없다. 세계 최고의 '숙의 기구(deliberative body)'라는 별칭이 상징하듯 충분한 토론이 보장된다. 한 의원이 단상에서 발언을 계속하면 중단시킬 수 없고, 결과적으로 발언하는 동안 회의가 지연되는 '의사진행방해'가 된 것이다. 필리버스터는 '해적(pirate)'을 뜻하는 네덜란드어가 어원이라는 해석과 같이 특정한 법안을 (납치해) 폐기시키려는 목적이 우선이다. 발언시간 동안 동화책을 읽든 헌법전을 읽든 의제와 관련 없는 발언이 무한정 허용되는 이유이다.

우리 국회법은 다르다. 한 사람에 의한 단상점거인 필리버스터와 달리 무제한 토론은 재적 3분의 1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의원들이 발언을 이어갈 수 있다. 의제와 관계 없는 발언이 허용되지 않는 점도 다르다. 필리버스터는 어떻든 시간을 끌어 회기를 넘기면 해당 법안이 폐기돼 버린다. 반면 우리는 회기가 끝나도 해당 의안이 폐기되지 않는다. 회기가 끝나면 다음 회기에, 무제한 토론이 종결되는 경우에는 즉시 해당 안건을 표결해야 한다. 한마디로 필리버스터는 처음부터 '의사진행방해'를 통한 법안 폐기에 목적이 있는 반면 우리는 말 그대로 쟁점사안에 대한 '무제한 토론'을 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여야를 떠나 일단 무제한 토론을 실시해 본 경험은 의미가 있다. 동물국회도 식물국회도 아닌 색다른 국회로 국민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여야의 '토론'이 아닌 야당만의 일방적 연설이 이루어진 사실이다. 기왕 국회법에 있는 제도가 발동되었다면 여당도 찬성토론에 적극 나섰어야 한다. 야당이 테러방지법에 관한 허위사실을 유포한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찬반토론을 통해 국민들이 제대로 된 진실을 접할 기회를 여당 스스로 차단한 셈이다. 국회라는 제도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야당의 제안이라고 거부한 것도 지나친 단견이다. 테러방지법 토론에 참여하면서 노동관련법도 원안과 수정안을 함께 본회의에 부의해 무제한 토론으로 결론낼 것을 제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월호 특별법 등 우리 사회를 마비시켰던 쟁점들을 무제한 토론으로 풀었더라면 갈등 해소가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연구해 볼수록 국회 선진화법은 우리 국회를 선진화시킬 수 있는 좋은 제도이다. 동물도 식물도 아닌, 제대로 활동하는 국회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한번이라도 사용해보고 폐기 여부를 논하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무제한 토론을 한번 경험한 이제 여야는 함께 고민해야 한다.
당리당략이 아니라 토론이 활성화되고 국민의 존중을 받는 국회를 만들어 내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때인 것이다.

노동일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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