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혐오를 부추길 생각은 없다. 정치 관련 칼럼을 종종 쓰지만 합리적인 시각을 유지하려 애쓴다. 무작정 정치를 비난한다고 정치가 갑자기 나아질 리 만무하다. 권위주의 정권에 비추면 그래도 나아졌다는 생각도 있다. 국민이 정치를 외면할 경우 우리보다 못한 자들의 지배를 받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정치판을 보면 다 부질없는 노릇 아닌가 싶다. 정치에 대한 욕지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이번엔 정말 투표하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이 주위에 너무 많다. 굳이 정치 혐오를 부추기지 않아도 정치인들 스스로 정치판을 비루한 집단으로 만들고 있다. 자신들의 수준을 아는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포기를 유도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번엔 자책골을 넘어 정치인들 스스로 막장 드라마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상상력의 끝을 모를 정도다. 힘 있는 자의 뜻을 빙자하여 수준 낮은 완장들이 설쳐댄다. 전자서명의 시대에 도장이라는 말조차 우스운데 옥새 운운의 시대착오적 언어가 횡행한다. 여야를 넘나들며 자신이 마시던 우물에 침을 뱉는 자들은 너무 많다. 법도 원칙도 실종 상태다. 특정인을 찍어내든 셀프 공천을 하든 내 뜻이 곧 법이라는 식의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19세기적 퇴행이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의 눈앞에서 버젓이 벌어진 것이다.
오늘은 정치권을 비난하는 것으로 그치고 싶지만 그러기엔 지면이 아깝다. 해법이 쉽지는 않다. 여야가 오십보백보이니 말이다. 누구를 응징해야 할지 모르겠다. 투표의 중요성과 주권자의 책임을 강조해도 결과가 뻔할 것이라 생각하면 힘이 빠진다. 정치인들이 국민을 무시하는 비열한 행태를 마음 놓고 저지르는 데는 무슨 짓을 해도 특정 정당만 찍는 유권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별수 있어? 투표에서는 우리를 찍을 수밖에 없잖아. 이런 오만함을 키운 게 유권자들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같은 방자함에 채찍을 가할 수 있는 힘도 유권자들이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모든 지역과 계층에서 의미 있는 경쟁이 일어날 수 있도록 다원화된 정당들이 필요하다. 헌법보다 선거법 개정이 중요하다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하지만 편안한 기득권 구도를 자발적으로 포기할 거대정당들이 아니다. 선거법 개정 정국에서 이미 목도한 바다. 아무리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공천을 해도 선거과정에서 상대를 비난하기만 하면 표가 되는 구도는 여전하다. 다행히(?) 야권은 의미 있는 균열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여권에서도 영남 패권주의가 종말을 고해야 한다. 종말까지는 아니어도 그럴 가능성이라도 보여주어야 한다. 친박, 비박 싸움을 보면 같은 당이라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체성이 다르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특히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복당을 하겠다는 무소속 출마자들의 변은 어이가 없다. 물론 선거용임을 이해한다. 그러나 정말 당선 후 복당을 구걸한다면 배알도 없다는 소리를 들어 마땅하다. 국민을 위하는 게 아니라 권력의 부스러기를 탐하는 정치꾼 밖에 되지 못한다. 이제는 용기 있게 특정 지역을 독식하는 정치구도를 깨겠노라고 나서야 한다. 분명히 밝히지만 어느 정당도 지지하지 않고, 그럴 마음도 없다. 하지만 우리의 장래를 위해서 정치에도 철저한 경쟁구도가 만들어져야 한다. 지역과 계층과 세대를 놓고 의미 있는 정책적 다툼이 일어나야 한다. 교착상태에 빠진 19대 국회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도 다당 구도는 꼭 필요하다. 정치인들이 못하면 유권자들이라도 지각변동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렇게 당하고도 계속 특정 정당만 찍어 주는 유권자라면? 무시당해 싸다는 말밖에 할 게 없다.
노동일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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