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야당이 박근혜 대통령의 '김병준 총리' 카드를 받아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거부할 경우 야당이 후회할지 모른다고 했다. 대통령 탄핵이나 하야 때는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다. 아마도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박근혜 대통령' 못지않게 야당이 꺼릴 것이다. 야당만이 아니다. 박근혜정부의 기조가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에서 많은 국민들 보기에도 탐탁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탄핵이 헌재에서 인용되면 이후 60일 내에 대선을 치르는 선거관리 내각을 황 총리가 이끌게 된다. 김병준 총리 거부는 야당의 첫 번째 패착이다.
국회에서의 총리 추천마저 외면한 것은 야당의 두 번째 패착이다. 당시만 해도 박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통해 본인의 과오를 인정하고 겸허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야당이 총리를 추천하고 대통령과의 회담에 임했다면 국정운영에 있어서 많은 양보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단칼에 자른 결과는 무엇인가. 단독영수회담 제안과 철회, '계엄령' 발언 등 민주당 추미애 대표의 헛발질을 거쳐 정국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되어 버렸다. 청와대가 검찰수사 거부라는 강수를 들고 나온 데는 야권의 어설픈 대응도 한몫했다. 야권이 이제 와서 총리를 추천하겠다고 나오자 청와대는 상황이 바뀌었다는 말로 거부 가능성을 암시한다. 말 바꾸기라고 비난하지만 오히려 탄핵을 추진하는 야권이 딜레마에 처한 상황이 됐다. "정치권이 박근혜 대통령의 덫에 걸렸다"는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의 탄식이 이를 잘 보여준다. "황교안 총리가 대통령 직무대행을 하면 죽 쒀서 개 주는 것"이라며 "총리 추천을 먼저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 위원장의 시각은 정확한 진단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덫에 걸렸다고 하는 부분은 동의할 수 없다. 야당이 스스로의 덫에 걸린 것이지 박 대통령의 덫에 걸린 게 아니라는 말이다. 당장 하야하라, 즉각 퇴진하라는 촛불 민심에 편승해 과욕을 부리다 자승자박이 된 것이다. 거리의 외침은 퇴진이지만 정치를 거리의 요구대로 할 수는 없다. 헌정 질서 내에서 정치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게 정치권이 할 일이다.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퇴진하지 않는 경우 탄핵은 민주적 징벌장치로서 유일한 방법이다. 검찰의 '피의자 입건'은 청와대의 항변처럼 확정되지 않은 사실이라 치자. 박 대통령 스스로 인정한 사실만 놓고 보아도 헌정질서 유린은 명백하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사사로운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휘두를 수 있도록 방치하거나 혹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악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탄핵이 인용될지 여부는 곁가지에 불과하다.
가장 빠른 해결책은 야당이 여전히 유효한 김병준 총리 카드를 받는 것이다. 다른 총리 후보와 달리 김병준 총리는 청와대가 거부할 명분이 약하다. 그게 싫다면 총리 후보를 추천하면 된다. 합의가 불가능할 걸로 전망되지만 일단 시도는 해야 한다. 그도 저도 어려울 경우 좌고우면할 필요가 없다. 대선주자 누구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따질 계제가 아니다. 야당이 걸린 덫은 스스로 만든 덫이다.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도 스스로 알고 있다. 항아리 덫에 걸린 원숭이가 잡히는 것은 손에 쥔 열매를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손에 쥔 듯한 권력 욕심을 내려놓아야 빠져나올 길이 보일 것이다.
노동일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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