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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 칼럼] 고건 대행과 황교안 대행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12.20 16:55

수정 2016.12.20 16:55

[노동일 칼럼] 고건 대행과 황교안 대행

'몸 낮춘 행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된 고건 총리가 선택한 처신의 자세였다. '고건의 공인 50년 다큐 스토리-국정은 소통이더라'에 나오는 얘기다. 고 전 총리는 3월 12일 오전 11시57분 탄핵이 가결되자 숨가쁘게 움직인다. 오후 1시30분 경제.외교.안보 관계장관 회의 소집, 오후 2시 총리 입장 발표, 3시 위기관리 내각 첫 국무회의 소집, 오후 5시50분 외교.통일부 장관에게 특별 업무지시 등을 이어갔다. 오후 6시15분에 야당이던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와의 통화도 눈길을 끈다.
탄핵에 대한 유감의 뜻을 표하면서도 국정운영에 한나라당이 적극 협조하겠다는 최 대표의 답을 이끌어낸다.

당시 헌정 사상 초유의 탄핵사태에도 국정이 안정되었던 이유로 고 전 총리를 첫손에 꼽을 수 있다. 워낙 '행정의 달인'으로 불리던 고 총리였다. 도지사, 장관, 서울시장, 총리를 거쳐 두 번째 총리를 하던 중이었다. 권한대행 매뉴얼이 있을 리 없던 시기, 국정의 맥을 잘 짚어간 그의 행보가 곧 교범이 된 것이다. 하지만 원만한 국정운영은 단순히 능통한 행정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선택한 '낮은 자세' 덕이 컸다. 그해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때였다. 청와대 비서실에서 연설문 원고를 가져왔다. 이를 총리실 연설 담당 보좌관이 손을 댔다. 고 총리의 화법에 맞게 수정한 것이다. 당장 원본을 가져오게 한 고 총리는 딱 두 글자만 고치고 원본대로 연설을 '대행'했다. 1인 2역에 그만큼 신경을 쓴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가결 후 황교안 총리가 권한대행으로 신속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외교.안보 분야를 먼저 챙기고,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총리 담화를 발표하는 등이 그것이다. 불행한 일이었지만 아마도 고 전 권한대행의 경험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황 총리를 둘러싼 내외 환경은 당시와 천양지차다. 황 총리에게서 국정운영의 노련미와 중량감을 느끼기는 어렵다. 최순실 등의 '국정농단'에 일정 정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도 부인하기 어렵다. 야당 등 정치권의 적대적 시선도 황 총리의 운신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황 총리가 권한대행으로서 유일호 경제부총리와 임종룡 금융위원장을 신속히 교통정리한 것은 잘한 일이다. 아쉬운 점은 있다. 사전에 여야 정치권에 귀띔하는 정치력을 발휘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황 권한대행이 총리로서 국회 대정부질문에 참석한 것 역시 긍정적이다. 특히 황 총리의 처신과 자세가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보수세력의 대안'이라는 말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점이다. 권한대행의 행보가 너무 소극적이어서도, 지나치게 적극적이어서도 안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고달프기만 한 권한대행 생활이었다"는 고 전 총리의 푸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고 전 총리의 책에 추천사를 쓴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글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만약 '고건'을 닮아 출세하려고 한다면 그의 높은 관직을 보지 말고 저 아랫자리에서 소리 없이 흐르는 하류의 강물을 보라고 충고하고 싶다." 나도 같은 말을 하고 싶다.
과거 대통령 권한대행을 어떻게 했는지 알고 싶다면 고 전 총리의 행적만을 참고할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몸 낮춘 행보를 선택한 그의 낮은 자세를 먼저 보아야 한다고.

노동일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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