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송강호에게는 특별한 힘이 있다. 스크린 속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날개를 펼쳐내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 그 현장에 서 있는 한 사람이 되어 관객에게 손짓한다. 그 누구도 이견을 내세울 수 없는 숭고한 송강호의 품격이다. 영화 ‘택시운전사’ 속 80년대로 돌아가 또 하나의 시대의 얼굴이 된 그는 송강호라는 브랜드를 더욱 견고히 세우며 온기를 전한다.
‘택시운전사’는 1980년 5월, 유일하게 광주를 취재해 전 세계에 5.18의 실상을 알린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태우고 들어간 서울의 한 택시운전사의 눈으로 광주를 담아내며 참혹한 비극으로부터 비롯된 새로운 희망을 불러낸다.
‘고지전’ ‘의형제’ 등의 작품을 통해 사건의 흐름을 읽기보다 역사의 본질과 인물의 교감에 초점을 맞추며 우리가 잊고 살았던, 상식을 상기시키는 장훈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의형제’에 이어 다시 한 번 장훈 감독과 손을 잡게 된 송강호는 10만원을 준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독일 기자를 따라나선 평범한 택시운전사, 만섭 역을 맡았다. 단순한 개구쟁이 같은 얄궂은 모습부터 목격한 진실로부터 오는 동요와 갈등을 유연하게 오가며 역사 속에 존재하지만 찾을 수 없는 그 오묘한 인물, 만섭을 스크린 위에 살려냈다.
▲ 그 시절 광주를 배경으로 하거나 80년대 상황을 다룬 기존의 작품들이 많다. ‘택시운전사’는 어떤 차별점을 세웠나.
“80년 광주라는 소재와 배경이 처음은 아니에요. 이전에 영화도 여러 편이 있었고, 문학 작품 등에서 아픔을 많이 묘사해왔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택시운전사'라는 영화가 관객 분들에게 새로움을 줄까가 가장 중요했어요. 이제는 37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수많은 일을 겪었잖아요. 그 아픔을 아픔으로만 담고 있는 게 아니라 광주 시민 분들을 포함한 수많은 분들이 어떻게 그걸 극복해왔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췄어요. 이게 이 작품의 핵심이에요. 일종의 '희망'이죠. 만섭이라는 인물이 어떤 정의감과 정치적인 사상 등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지키고 싶은 것이에요.”
▲ “대학생이 데모를 하고, 배가 불렀다”고 말했던 평범한 남자가 어느새 자그마한 영웅이 되어서 정의와 도리를 실현한다. 그 간극이 매력적이다.
“보편적인 감정이었을 거예요. 어른 입장에서는 공부를 해야 할 나이에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가장 보편적일 테고 군인이 그렇게 폭력을 할 수 있나 싶던거죠. 그런 생각을 가진 채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 거에요. 잔인한 광주의 현장들을 목도한 뒤, 분노보다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거죠. 그 안에는 용기도 필요했고요.”
▲ 역사 속의 참상을 겪어야 하는 인물로, 촬영할 때 마음이 편치 않았겠다.
“모든 장면들이 마음이 아팠지만 금남로 장면이 가장 울컥했어요. 물론 뒤에 총을 쏘고 사람을 때리고 이러한 장면들이 많이 나오지만 저한테는 금남로 첫 장면이 너무 세게 왔어요. 아무리 영화 촬영이지만 광경을 목도한다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아서 무겁고 참 고통스러웠어요.”
▲ 영화 속에서 표현된 인물들이 다소 평면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인물에게 부여된 드라마적인 서사가 부족해서일까.
“그 때 당시의 광주 시민들이 정말 다들 그랬어요. 광주 시내 통틀어서 절도 사건이 단 한 건도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기름도 다 공짜로 주고 택시 기사들은 무료로 시민부상자들을 나르고 그랬대요. 일부러 다양하게 인간 군상을 만들어내려고 해도 당시 광주 시민들의 순수한 마음을 왜곡할 수 없잖아요. 일종의 딜레마죠. 인간 군상들이 입체적이지 않은 것은 있지만 왜곡할 수는 없어요.”
▲ ‘택시운전사’를 초반에 거절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어느새 만들어진 ‘정치적’ 프레임이 부담으로 다가왔나.
“마음의 준비가 잘 안됐어요. 원래 제가 시나리오 받으면 출연 여부에 대해서 빠르게 대답해요. 또 나름대로 오랫동안 고민을 하는 성격이 못 되다 보니까 일단 거절을 해버렸죠. 그런데 점점 마음속에 이야기가 커져갔어요.”
▲ 마음의 준비라면 어떤 준비를 뜻하나.
“‘변호인’ 때와 비슷해요. 많은 분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故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삶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면 이것도 마찬가지였어요. 이 아픈 비극과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아픔을 부끄럽지 않게 관객 분들에게 자신 있게 전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하루 이틀 만에 결정되긴 어려웠거든요. 하지만 뜨거움 같은 것이 점점 커졌어요. ‘변호인’과 ‘택시운전사’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런 지점이에요.”
▲ ‘믿고 보는 배우’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그만큼 송강호가 넘어서야할 산이 더욱 높아진 것을 방증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송강호가 출연한다고 하면 어느 정도 스토리가 그려진다고 하더라. 익숙함에 잠식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경계가 필요하지 않을까.
“배우가 작품을 선택할 때 전작이 지닌 리듬과 비슷하다고 해서 ‘못한다’ 하는 기준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리듬보다는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가장 중요했고 원하는 감정을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부분들은 제가 안고가야 할 기나긴 여정 속에 한 부분을 차지할 거예요. 배우라는 직업이 스포츠 선수, 장거리 주자처럼 달리기해서 등수를 매기는 직업이 아니니까요. 자연인 송강호와 배우 송강호가 같이 연륜을 쌓아가면서 긴 세월 동안 행해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길게 보고 싶어요.”
▲ 하지만 그 익숙함도 송강호라는 배우를 향한 단단한 신뢰 속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막중한 책임감도 함께 찾아올 것 같은데.
“책임감이라고 하기 보다는 부담감이 있죠. 수많은 후배들이나 많은 영화 관계자들, 관객 분들까지 수백만이 될지, 수천만이 될지 모르는 그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연기를 하고 싶어요. 일개 배우가 무슨 책임감이 있겠어요.(웃음) 어떤 자리에서는 건강한 부담감이라고 표현을 하긴 했는데 건강해도 부담감은 부담감이에요. 하하.”
/9009055_star@fnnews.com fn스타 이예은 기자 사진 쇼박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