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금융일반

[강남시선] 이름이 주는 함정

전용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5.05 18:54

수정 2024.05.05 18:54

전용기 금융부장
전용기 금융부장

미국 워싱턴DC의 'K스트리트'를 찾는 한국 기업이 최근 부쩍 늘었다. 오는 11월 5일 미국 대선 이후 펼쳐질 산업 영향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다. 물론 대선 주자인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한 뼘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한 목적이 크다. 백악관에서 북쪽으로 500m 떨어진 K스트리트에는 수많은 로비회사가 집결해 있어 이른바 '로비의 거리'로 불린다. 2년 전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혼이 난 탓에 K스트리트를 중심으로 대미 로비를 위해 사무소를 설치한 한국 기업이 크게 늘고 있다. 삼성전자, 현대차, 포스코, LG전자, SK 등 대기업 25곳을 포함 40개사가 현지에 대관 사무소를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로비 관련 지출금액도 커지고 있다. 실제 미국 로비자금 지출정보를 공개하는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삼성그룹의 지난 2023년 미국 의회 등 로비자금은 전년보다 8.8% 늘어난 630만달러(약 85억원)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로비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과 달리 한국에선 로비에 대해선 관련법이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다. 그 대신 불법로비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 등에 관한 법률 제3조 '알선수재죄'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그 때문에 국내 로비활동은 대부분 대형 로펌이 도맡아 하고 있다. 그동안 로비를 양성화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로비스트 관련 법안 마련에 진심이었던 의원은 바로 정몽준 현 아산재단 이사장이다. 정 이사장은 '외국대리인 로비 활동 공개에 관한 법률안'을 지난 2001년과 2004년, 2011년에 국회에 대표 발의했다. 외국의 이익을 위해 국내에서 활동하는 로비스트를 법무부에 공개 등록하고 정부 정책 결정 과정이나 국회 입법 과정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외국인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로비스트를 양성화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에 번번이 자동 폐기됐다.

로비스트 양성화 법안은 사실 '로비스트'라는 이름 때문에 공론화 과정도 제대로 거치지 못했다. 부정청탁을 떠올리는 이름의 함정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름이 주는 긍정적 의미 때문에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심각한 부작용이 덥힌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자제한법 개정안'이다. 이자제한법 개정안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022년 대표 발의한 법안으로, 지난해 민주당이 연내 처리할 '1호 법안'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대표가 지난 3일 22대 국회 당선자들에게 "당론을 무산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한 만큼 속도를 낼 전망이다.

이자제한법 개정안은 연 20%인 법정 최고이자율을 초과한 이자계약 전부를 무효화한다. 한발 더 나아가 연 40%를 넘는 대출계약은 이자는 물론 원금까지 갚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서민들, 특히 저소득·저신용자에게 과도한 이자 부담을 줄여주는 법안에 찬성하지 않을 국민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국회가 법정 최고이자를 연 20%까지 낮추면서 저소득·저신용자들의 급전 창구인 저축은행과 대부업체는 수익성 악화에 대출을 축소하고 있다. 시중금리 상승으로 조달금리 부담은 커지는데 받을 수 있는 이자 상한은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연체율과 대손비용은 급증하고 있다. 생존조차 장담하지 못하는 저축은행과 대부업체가 속출하면서 이자제한법 개정안은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저축은행과 대부업체가 문을 닫으면 저소득층 입장에서 돈을 빌릴 데가 없어져 불법 사금융이 더 음성화될 수밖에 없다.

22대 국회가 시작되면 이자제한법 개정안처럼 서민을 위한다며 선의로 포장된 각종 법안이 쏟아질 것이다.
일단 표가 된다면 그 법안에 숨겨진 부작용은 애써 외면할 것이다. 의도가 선하지 않으면 그 결과도 선하지 않다.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선 위선의 가면을 벗어야 한다.

courage@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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