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고깔모자 아래 바보들 ①

      2009.03.10 18:08   수정 : 2009.03.10 18:08기사원문


■글: 박병로 ■그림: 문재일
김순정은 카페 창가에 앉아 명동길을 내려다보았다. 옛 상업은행 앞 네거리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강남역과 홍대 앞으로 젊은이들이 분산돼 옛날의 명성에 미치지 못하지만 명동의 번화함과 활기는 여전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와 전망 좋은 자리를 굳이 맡은 것은 공작원들에게 명동길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말이 공작원이지 사실상 자본주의를 견학하는 중이었다.
일본인 관광객 반 한국인 반이라고 하는 명동길을 내려다보며 그들도 아마 많은 생각을 할 것이었다.

조직에 복귀하라는 명을 받자마자 김순정은 복귀일정계획 변경을 요청했다. 조직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적인 속내를 드러낸 셈이었다. 오늘 만나는 공작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옛 공작원들은 자아비판을 하고 독배를 마시고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옛말이었다.

“김순정 동무. 서울 사람 다 됐습네다?”

귀에 익은 억양의 공작원 Q가 바람처럼 옆에 와서 앉았다. 함께 훈련할 때 맡던 익숙한 입 냄새가 났으나 그는 명품으로 치장한 예쁘고 튼튼한 청년으로 변신해 있었다.

Q가 뮤지컬의 한 장면처럼 과잉된 제스처로 느끼하게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일 없습네다. 떨어져 앉으시라요.”

그때 몸에 꼭 끼는 짙은 회색 슈트 차림의 공작원 X와 미니스커트를 입은 B가 사귄 지 얼마 안 된 커플처럼 어색하게 팔짱을 끼고 나타났다. 약속시간에서 2분이 지나 있었다. 종업원이 와서 김순정이 시킨 칭다오 맥주를 주문표에 적어 넣고 물러갔다.

“김순정씨의 요청은 거부됐소. 복귀 프로젝트는 일정대로 추진할 것이오.”

고깔 모양의 뾰족한 전등 아래로 얼굴을 들이 밀면서 Q가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소녀시대인지 카라인지 음색이 다채로운 여성그룹의 소란스런 노래 속에서 그들은 Q가 전하는 메시지를 접수했다. 그들은 입 모양과 눈빛과 손놀림만으로도 의사전달이 가능했다.

“할 일이 아직 더 있슴다. 다시 한 번 보고서를 검토해 보시라요.”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던 김순정이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마카로니 튀밥과 맥주를 가져와 내려놓는 종업원의 손끝을 바라보며 김순정이 말했다.

“재고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명령을 따르지 않갔시오.”

나머지 세 사람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필립씨가 뭐가 그리 좋아요? 머리는 늘 지저분하고 키도 안 크고 난 별로던데.”

공작원 B가 바람기 많은 아가씨처럼 말했다.

“어쨌든 재미 좋겠어요. 사랑을 즐기면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니.”

“자기 말을 남한테 빗대 말하지 마시라요, B선생!”

B가 움찔 놀랐다. 세련된 서울 말씨에 연애경험이 풍부한 여성처럼 행세하는 B가 떳떳한지 따져보고 싶었다. 남쪽에 와서 생활을 하다 보면 자주 정체성이 혼란스러웠다. 연변 조선족이 되기도 하고 열렬한 자본주의 신봉자 행세를 할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길거리에서 대시해 오는 남자를 힘들게 쫓아버려야 할 때가 있고 부화방탕한 놀음에 초청을 받기도 했다. 그러니 B도 자유롭지 못했다.


“잘 보시라요, 이게 뭐이냐 하믄 말임다.”

김순정이 목걸이 모양의 이동식 저장장치인 USB 3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상세하게 보고한다고 한 것이 여기 다 들어 있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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