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고깔모자 아래 바보들 ⑭
2009.03.29 18:41
수정 : 2009.03.29 18:41기사원문
■글: 박병로 ■그림: 문재일
빈 오피스텔에 들어서자마자 김순정은 창문을 열었다. 봄 날씨 같지 않게 날씨가 후텁지근했다. 한강변을 달리는 기차를 타고 오면서 방금 전 본 한강이 창밖에 펼쳐져 있었다. 병풍처럼 세워진 아파트단지와 강안 양편의 자동차전용도로, 강남북을 잇는 다리, 그리고 넘실거리는 한강물이 볼수록 풍요롭고 문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돌아와 숨고르기를 하고 주식시황을 보니 비명소리가 낭자했다. 오늘 하루에 무려 8%포인트 정도 하락했다. 뉴스를 검색해 보니 벌써 검은 월요일이라는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김순정은 몸이 붕 떠오른 듯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이 말랐다. 아침에 매수 주문을 넣었던 거래가 체결됐다면 틀림없이 큰 손실을 보고 있을 터였다.
아아! 그러나 김순정은 기쁨에 겨워 비명을 질렀다. 매수 주문을 넣었던 종목에 거래가 이뤄졌고 이 종목은 거의 상한가까지 치고 올라와 있었다. 장마감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40분…. 매도할까?
김순정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차트를 살폈다. 추세선을 보니 흔히 말하는 세력이 주가를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우상향 추세선이 반등을 계속하고 있는데 지금은 거래량에 변동이 별로 없는 채로 직전 저점과 심리적 저항선까지 치고 올라가고 있었다. 주식을 웬만큼 하는 개미라면 꿰뚫어 볼 만한 빤한 차트였다. 주식투자클럽의 사부가 강권한 이유가 이것인가 싶었다.
팔자.
김순정은 가차 없이 매도 주문을 클릭했다. 붙잡고 뭉그적거리다 이익을 실현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다. 거래는 금세 체결됐다. 시장가로 주문을 넣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수익률이 투자액의 19%로 김순정이 주식 거래를 한 이래 가장 뛰어난 성적이었다.
온몸에 영양분이 공급되는 것처럼 승리감이 퍼져나갔다. 포도당 링거를 맞을 때 이처럼 기운이 났을까. 돈을 버는 한국 여자들이 느낀다는 절정감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일 것도 같았다.
문득 다른 사람들의 실적이 궁금했다.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만족스러운 수익을 냈지만 비교우위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기쁨을 참아야 했다. 노이만, 오프라 팰리스, 오시리스가 그보다 고수익을 냈다면 여전히 그녀는 허기를 느낄 것이었다.
“오늘 동전 점괘가 어케 나왔나요?”
김순정은 휴대폰을 꺼내 세 사람에게 문자 메시지를 전송했다. 5초쯤 지났을까. 딩동, 하는 신호음과 함께 답장 메시지가 도착했다.
“500(뒷면!)”
오프라 팰리스였다. 조금 있자 노이만과 오시리스도 같은 뜻의 문자를 보내왔다. 그렇다면 오늘 옵션거래에서 내리는 쪽에 베팅을 했을 가능성이 컸다. 코스피200지수가 하루 동안 7% 정도 빠졌으니 얼마를 먹었을까? 어느 가격대의 옵션을 매수했는지 모르지만 점괘대로 베팅을 했다면 틀림없는 대박이었다.
우울한 심정으로 김순정이 문자를 다시 보냈다.
“저, 지금 사무실∼. 뭐 도와드릴 일 없나요?”
성공이든 실패든 김순정은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냅둬유.”
오프라 팰리스가 답신을 보내왔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응답이 없었다. 대체 어디에 어떻게 베팅을 했을까. 아침에 집단행동을 할 것처럼 모여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억하심정으로 점괘와 반대로 베팅을 하기라도 했다면 어찌되는가.
“지금 폭락장인 거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