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억짜리 빌라, 전셋값이 2억 집 보기도 전에 계약금 요구
2015.10.04 17:37
수정 : 2015.10.04 21:39기사원문
#. 서울 사당동 B공인 중개업자는 전세 물건을 찾는 고객들에게 집을 보여주기 전 집주인 계좌번호를 불러주고 있다. 전세 매물이 워낙 귀한 데다 전셋집 수요자들이 워낙 많이 대기하다보니 집을 보고 난 후 계약금을 송금하면 전셋집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지역 전세난이 수년째 계속되면서 위의 사례처럼 곳곳에서 전셋집을 구하는 세입자들의 온갖 눈물겨운 사연이 쏟아지고 있다.
전세시장에서 집주인이 보증금을 터무니없이 많이 올려 달라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됐고, 전셋집을 구하기 위해 '깜깜이 계약'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저금리가 지속되면서 전세물건이 월세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지만 전세수요자는 줄지 않고 있어서다.
■계약 직전 갑자기 "보증금 더 올려달라"
4일 서울지역 중개업계에 따르면 김모씨(35)는 지난달 말 전셋집 본계약을 앞두고 집주인이 구두 합의한 전세보증금을 갑자기 이틀 만에 2000만원 더 올리겠다고 통보해 한 차례 큰 실랑이를 벌였다. 김씨는 살던 곳 인근에 전세보증금 1억8000만원짜리 신축 빌라가 나와 연락해 보니 이미 500만원이 올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잠시 후 집주인은 중개업자를 통해 500만원을 추가로 더 올리겠다고 통보했다. 전세 만기일도 다가와 김씨는 화를 참고 계약하려고 했지만 다음 날 집주인은 갑자기 1000만원을 더 올리며 2억원의 전세금을 요구했다. 김씨는 "알아보니 그 빌라의 매매가가 2억원이었다"며 "전세로 들어가겠다는 사람이 워낙 많은 건 알겠지만 전세보증금을 매매가격까지 올리는 것은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푸념했다. 결국 김 씨는 그 빌라 전세계약을 포기했다.
■취업준비생 전세보증금 부담에 낙향도
이 같은 실랑이는 대학교 주변 원룸촌에서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취업을 준비하던 남모씨(27)는 급등하는 전세보증금에 고시원을 전전하다가 고향으로 내려간 안타까운 사례다. 남씨는 "2년 전 6500만원이던 원룸이 8000만원까지 올랐다"며 "요새 전셋값이 많이 올랐다고 하지만 부모님에게 보증금을 더 달라고 할 수 없어 결국 낙향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남씨는 서울에서 진행되는 취업설명회에 참여하거나 면접을 보기 위해 한 달에 수십만원의 교통비를 쓰고 있다. 그는 "타지에 있는 직장에 다니게 되면 또다시 높은 전셋값을 부담하게 될 것 같아 걱정"이라며 "요즘은 연봉이 조금 적어도 집에서 통근이 가능한 직장도 함께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전셋집 안보고 계약금부터 입금
중개업자들은 최근 들어 많아진 '깜깜이 계약'에 세입자들도 적응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깜깜이 계약이란 전셋집을 둘러보지 않고 물건이 등장하자마자 가계약금을 치르고 이후 집을 둘러본 후 본계약을 진행하는 것을 말한다. 워낙 전세수요자가 많다보니 전셋집을 둘러본 후 계약금을 지불하면 늦기 때문에 선계약을 하는 방식이다.
서울 사당동 B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예전에는 세입자가 전세 물건을 보고 가계약금을 치르고 이후 본계약금을 치른 후 입주하는 형태였는데 요즘은 세입자들이 먼저 가계약을 위해 (집주인의) 계좌번호를 불러달라고 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세입자 신상정보 요구해 가려 받기도
전셋집이 워낙 부족하다보니 세입자를 가려 받으려는 집주인도 생겼다. 지난달 서울시 성북구 길음동의 U공인중개사무소 박모 대표는 한 전셋집 주인에게 "전셋집을 구하는 사람들의 정보를 알아봐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안정적인 소득을 올리는 직장인 세입자나 수입이 많은 자영업자를 얻어야 전세금을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무리한 요청이라고 생각해 에둘러 거절했지만 결국 다른 중개사무소에서 '세입자 서류심사'를 도와줬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씨는 "아무리 전세난이 심하다 해도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며 "그런 일을 한 번 겪고 나니 요즘은 전셋집을 알아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차라리 대출 더 받아서 집 사라고 충고한다"고 말했다.
fair@fnnews.com 한영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