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7만원으로 이틀만에 창업했어요"
2015.11.19 17:25
수정 : 2015.11.19 22:08기사원문
【 길퍼드(영국)=박소연 기자】 런던의 대표 관광지 런던아이가 한눈에 보이는 워털루역. 우리의 서울역 격인 이곳에서 열차를 타고 30분 남짓 달리면 길퍼드역에 도착한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런던 시내와 거리는 멀지 않지만 분위기는 자연적이고 고즈넉하다. 고가의 주택도 많다. 어쩐지 '돈 잘 버는 도시'로 통한단다.
길퍼드역으로 가는 길에는 '일(working)'이란 이름의 역도 지난다. 역 이름마저 '근무 중'이다. 열차 안에서 언뜻 봐도 필립스, 에릭슨 등 유수의 회사가 모여 있다. 외곽이라고 하지만 생기 넘치는 동네다.
목적지는 '서리 연구단지(Surrey Research Park)'. 길퍼드시가 벌어들이는 돈의 상당부분을 기여한다는 곳이다. 영국 대학순위 4위를 차지한 서리대학교가 소유·운영한다. 위치도 바로 붙어 있다. 길퍼드역에는 서리대학교로 가는 셔틀버스가 한 시간에 네 번씩 있다. 학교 셔틀버스를 타고 어렵지 않게 연구단지에 도착했다.
서리 연구단지는 런던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학 클러스터'다. 대표적 산학협력 공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집적단지' 정도 되는 개념의 '클러스터'는 영국에서는 '젊고 세련된' 이미지까지 포함하고 있어 대학을 갓 졸업한 학생들에게도 인기 직장이다.
지난달 27일 오전 10시께 도착한 단지에는 화려한 단풍이 한창이었다. 한눈에 봐도 아름다운 자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서리대학교가 정부로부터 이례적으로 개발제한구역을 해제받아 개발했다. 산학 연구개발(R&D)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1985년 기술 혁신 클러스터로 출발한 서리 연구단지에는 현재 127개의 기업이 입주, 350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서리 연구단지는 2012~2013년에만 1만6200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이 기간 영국 경제에는 약 14억파운드(약 2조5000억원)를 벌어다 줬다.
■7만원·이틀이면 내 회사 '뚝딱'
"회사 세우는 데 40파운드(약 7만2000원) 들었어요. 서류 절차는 이틀 만에 끝났죠."
유명 컨설팅회사에 근무하다 3년 전 이곳에서 창업을 결정한 케빈 라이버스 매트릭스 대표가 말했다. 라이버스 대표가 처음 둥지를 튼 곳은 '인큐베이터'로 불리는 15㎡ 남짓한 작은 공간이다. 서리 연구단지는 초기자본이 없는 기업을 위해 건물의 자투리공간을 거의 무료로 제공한다.
절차도 거의 없다. 말콤 페리 서리 연구단지 이사장은 "길퍼드시에 가서 관련 서류를 내면 20분 만에도 회사를 만들 수 있다"면서 "절차는 아주 유연하다"고 강조했다.
회사가 몸집을 키우면 큰 공간으로 옮길 수 있다. 서리 연구단지는 크기별로 4개 공간으로 나누고 있다. 필요하면 방 3~4개를 붙여 쓸 수도 있다.
우울증 치료제, 비타민 등을 생산하는 제약기업 매트릭스는 서리 연구단지 내 핵심 건물인 '테크놀로지센터'에 입주해 있다. 생산공장이 스페인에 있기 때문에 2명의 팀원과는 주로 인터넷으로 업무를 진행한다. 평소에는 혼자 사무실을 지킨다.
"기업 차릴 때 제일 힘든 게 뭔지 아세요? 인터넷, 전화, 냉난방시스템 이런 거 들여놓는 거예요. 사소해 보이지만 없으면 안되는 것들이죠. 여긴 이런 게 불편없이 지원돼요. 기업을 하려는 사람들이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죠." 라이버스 대표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단지의 입주업체들은 회의룸과 멘토링 서비스를 공유하기 때문에 기업 간 소통이 원활하다. 6주에 한 번씩 열리는 투자회의에도 입주기업 대표들이 직접 참여한다.
창업이 실패해도 물어내야 하는 돈이나 부담 같은 건 없다. 페리 이사장은 "기업들이 처음 입주할 때 쓴 계약서에는 30일의 기간 요건만 명시돼 있다. 무슨 이유든 회사를 접기로 결정했다면 아무 부담없이 나가면 된다"고 설명했다.
■英, 정부는 투자자·벤처 가교역할
투자가 중요한 기업들에 서리 연구단지의 최대 강점은 '엔젤클럽'이다. 신생기업이 돈을 벌 수 있도록 도와주는 '키다리 아저씨'들이다. 페리 이사장은 "대부분 스타트업(창업초기기업)들은 아이디어는 있지만 돈이 없다. 이들을 위해 엔젤클럽 회원들은 6주마다 만난다. 만나서 어디에 어떻게 투자할지 치열하게 고민한다"고 소개했다. 정부는 돈 있는 투자자와 일하는 기업을 이어주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산학협력·기술 이전과 관련해 대학이 연구성과를 비즈니스와 연관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는 유니버시티 챌린지 펀드를 활성화하고 있다.
인재 찾기가 수월한 것도 장점이다. '좋은' 대학교 옆에 있는 덕분이다. 서리대학교의 인지도는 서리 연구단지가 만들었다. 대학순위 10위권 밖이던 서리대학교는 서리 연구단지가 생긴 이후 4위로 뛰어올랐다. 또 다른 입주기업 골드아이(FX 마진 거래 프로그램 개발사)의 신입 직원 찰스는 "처음엔 대기업에 지원했다가 떨어졌어요. 찾아보니까 이곳 연구단지에 채용공고가 많더라고요. 대기업 가서 작은 역할을 하느니 여기서 전문성을 기르는 것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죠. 또 많이들 그렇게 하니까요"라고 귀띔했다.
영국은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7대 창업촉진전략 중 '창업생태계 조성'을 가장 우선순위에 배치했다. 물질적 지원보다 문화를 확산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를 위해 2005년부터 6년간 매년 6000만파운드의 예산을 투입, 현재는 영국 중학교(key stage 4) 90% 이상이 기업가정신 교과과정을 개설하고 있다. 사업등록 등 창업에 대한 실무도 배우지만 이 과목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건 토론을 통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는 문화다. 피드백으로 이뤄지는 수업은 영국 기업가들을 배출하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psy@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