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라이벌' DJ와 YS

      2015.11.24 17:03   수정 : 2015.11.24 17:03기사원문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김대중(DJ), 김영삼(YS) 두 전직 대통령(이하 존칭 생략)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우리 정치와 사회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다를 것이다.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 vs 김영삼'(왕의서재)의 저자(이동형)는 "두 사람이 없었으면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아직 오지도 못했다"고 단언한다. 단정할 수야 없지만 민주화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있다. DJ나 YS 한 사람만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처럼 둘은 서로 경쟁하면서 기록을 만들어온 것이라 생각한다.
동 시대에 태어나 민주화라는 과제를 때로는 경쟁자로, 때로는 협력자로 함께 추구해온 경우는 역사에서도 찾기 어렵다. "우리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특수관계였다"고 회고한 YS의 말 그대로이다.

두 사람의 정치적 라이벌 관계는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 과정에서부터 형성되었다. 당시 관행대로 유진오 당수가 지명한 김대중 의원의 당선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상황이었다. 뜻밖에도 의원총회에서 인준안이 부결된다. '영원한 라이벌' 저자는 이를 김영삼 의원의 '땡깡' 탓이었다고 본다. 정치적 감각을 타고난 김영삼이 앞으로 김대중이 평생의 라이벌로 등장할 것을 직감하고 김대중의 성장을 필사적으로 막았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이후 둘은 말 그대로 평생의 라이벌이 된다. 19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는 다 이긴 듯하던 YS를 꺾고 DJ가 후보로 선출된다. '40대 기수론'을 먼저 주창한 YS가 분루를 삼킨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주의 시절을 거친 두 사람은 1984년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한다.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경쟁에서 협력관계로 돌아선 것이다. 짧은 기간 동지로서 민주화를 이뤄냈지만 1987년 대통령후보 단일화 실패와 대선 패배로 두 사람은 반목의 행로를 걷고 만다.

하지만 그 이후 행적도 둘은 결국 비슷한 길을 간 것이라고 본다. YS는 1990년 3당합당을 통해 1992년 대선에서 대통령의 꿈을 이룬다. 군부정권의 후예들과 민주화 투사가 손을 잡은 모양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승부수가 적중한 셈이다. DJ도 1997년 DJP 연합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다. 유신정권의 최대 피해자가 '유신본당'을 자처한 사람과 공동정권을 만든 것이다. 3당합당을 밀실야합이라고 비난하면서도 YS로부터 국면 타개를 위한 승부사적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 DJ에 앞서 YS가 먼저 대통령이 된 것도 예사롭지 않다. 군사정권의 그림자가 아직도 짙게 드리워져 있던 문민정부 시절이다. 대통령 취임 10여일 만에 전광석화처럼 하나회를 숙청해 나감으로써 군부의 정치개입은 근원적으로 차단되었다. YS가 아니었으면, 3당 합당의 배경이 없었으면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2009년 DJ에 이어 YS도 영면에 들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이 '통합과 화합'이라는 것은 울림이 크다. 라이벌로서 이 땅에 민주화의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두 사람의 부정적 유산이 지역주의의 고착화이기 때문이다. YS는 1987년 단일화 실패를 '천추의 한'이라고 표현해 왔다. 마찬가지로 3당합당으로 지역대결 구도가 공고화된 것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YS의 유언이 아니어도 통합과 화합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 영남과 호남, 보수와 진보, 나아가 남과 북의 통합과 화합까지 함께 이루어낼 위대한 라이벌의 시대가 다시 한번 도래하길 고대해 본다.
YS의 영원한 안식을 빈다.

노동일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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