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성대를 위한 수성의 통치철학
2017.12.04 16:57
수정 : 2017.12.04 16:57기사원문
옛 사람이 이르기를 "수성(守成)은 창업보다 어렵다"고 했다. 창업의 위업을 만세까지 태평성대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창업과는 다른 수성의 통치철학이 요구된다. 창업 때는 힘에 의한 통치(權道)가 통했다면 수성은 바른 길(正道)로 다스려야 한다.
수성이 본격 거론된 것은 세종과 성종 때였다. 세종은 집현전에 인재를 모아 태평성대의 길을 모색했지만 후계자의 단명과 세조의 혁명으로 지속되지 못했다. 성종은 다시 수성을 본격화하기 위해 세조 때 정지된 '경연(經筵)'과 '홍문관'을 부활시켰다.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경연에 성종은 매일 세 번 참석해 정치 문제까지 논의했다. 집현전을 대신할 기관으로 홍문관을 개편하고 경연을 맡을 인재를 배치했다. 이때 발군의 실력을 보인 인물이 조선 성리학의 적통을 이은 김종직이었다.
김종직과 그의 아버지 김숙자는 성리학을 정몽주의 제자인 길재에게서 배웠다. 세조 때 벼슬길에 오른 김종직은 실용학문을 권한 세조에게 반기를 들어 파직된 바 있다. 그런 그가 성종의 등극과 함께 경연관에 발탁되었다. 임금을 가까이 모시며 총망받던 그는 외직을 자청해 함양군수와 선산부사로 나갔다. 그는 지방 수령으로 주민 교화와 제자 양성에 나섰다. 그가 고을을 다스리면서 학생들을 가르치자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이 모여들었다. 또 그는 관혼상제를 주자가례에 따라 시행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향음주의(鄕飮酒儀), 양노례(養老禮) 등의 마을행사를 열었다. 이때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애가 좋은 사람, 재능과 기예가 있는 사람의 순으로 참가시키고 어질지 못한 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고을 사람들의 행실을 바로잡았다. 성리학으로 향촌사회의 민심을 얻고 질서도 바르게 했다는 것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그는 다시 중앙의 부름을 받았다. 그후 그는 홍문관 요직을 거쳐 승정원 도승지에 올랐으며, 형조판서 등을 거쳐 지중추부사로 퇴임했다.
김종직은 단순히 학자풍 관료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유학 덕목의 실천으로 향촌사회의 질서를 확립해 수성의 담론을 주도했다. 또 후진을 양성해 이들을 중앙 관계에 진출시켰고, 언로를 장악하게 해 정치세력으로 키웠다. 이들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사림은 훈구세력을 비난하며 기득권 공신세력과 한판 정치싸움을 벌이게 된다. 반면 실용을 추구했던 훈구 혁신세력은 변화하는 시대 요청에 눈감고 제 식구 자리 챙기기에 급급하는 바람에 민심에서 멀어져 갔다.
마침내 수성의 통치철학으로 성리학이 굳건히 자리 잡게 되었다. 성리학은 여러 유교 분파 중에서 '예(禮)'를 중시하고 몸과 마음을 닦는 수양으로 도덕을 강조한 도학이다.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를 거쳐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에 의해 절정을 맞이한 성리학은 오백년 조선을 지탱해준 지주였다. 하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역시 수성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호철 한국IR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