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가족도 빌리는 시대..‘리얼충’을 아십니까?
2017.12.12 13:00
수정 : 2017.12.12 21:48기사원문
【도쿄=전선익 특파원】“회사 후배들이 졸라서 일주일에 한번씩 모임을 하는데 밥값이 많이 드네.”
일류 디자인 회사 관리직에 종사하는 그녀. 오랜만에 열린 대학 동창회에서 회사 후배들과 찍은 사진이 담긴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자랑스럽게 꺼내놓습니다. 그녀의 SNS는 회사 동료들 사진과 결혼을 약속한 연하남 사진들이 가득합니다.
사실 그녀는 회사에 다니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현재 방영중인 일본드라마 ‘형사 유가미’의 내용입니다. “드라마니 그렇지 현실이야 어디 그렇겠어”라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지만 현재 일본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리얼충’이란 블로그나 SNS 같은 온라인 관계가 아닌 실제사회에서 인간관계나 취미활동을 즐기는 '현실을 충실이 살아가는 사람'을 뜻하는 속어입니다. 반면 '리얼충 대행서비스'란,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 처럼 꾸며주는 대행서비스 입니다. 한국에서도 가끔 보이는 ‘결혼식 하객알바’ 같은 것이 대표적인 리얼충 대행 서비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리얼충 대행서비스는 한 발짝 더 진화하고 있습니다. 결혼식 이후 열리는 피로연 참석은 물론 애인이나 친구, 가족까지 대행해 줍니다. ‘아버지·어머니 대행’과 ‘자식(아이) 대행’을 사용하면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가족도 바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누군가에서 된통 야단을 맞고 싶을 때 쓸 수 있는 △꾸지람 대행, 속상한 일이 있을 때 터놓고 말할 수 있는 △푸념 대행, 누군가에서 대신 사과해 주는 △사과 대행, 미팅을 주선해야 할 때 쓸 수 있는 △미팅 대행, 가게가 인기 있는 것처럼 연출 할 수 있는 △고객 대행, SNS 속 인기인처럼 보일 수 있는 △SNS 대행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정말 대행해줄 수 있는 건 모든 다 대행해 주는 모습입니다. 이 모든 서비스는 한 시간에 약 8000~1만5000엔(한화 약 7만6000원~14만원)이면 쓸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리얼충 대행서비스’가 확산되는 이유는 ‘나홀로족’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직장이나 학교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미 10년 전인 2007년 ‘혼밥’을 즐기는 직장인이 전체의 30%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타인과 섞이기보다 혼자 자유를 느끼는 것이 더 좋다고 느끼는 나홀로족은 이미 일본사회를 대표하는 사회 현상이 됐습니다. 일본 직장에서는 사내 회식문화도 사라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시티즌시계(도쿄)가 지난 4일 1년차 사회인 4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 일본의 신입사원 41.5%가 ‘상사와 회식이 전혀 없었다’고 답했습니다. 회식을 통한 상사와의 교류보다 혼자 취미생활을 즐기길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리얼충 대행서비스는 사회관계를 쌓는데 어색해 하는 일본의 나홀로족을 위해 생겨난 서비스 입니다. 혼자이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자신이 현실에서 인기가 많은 사람인 것 처럼 보여지고 싶어하는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지요.
‘나홀로족’은 자칫 잘못하면 ‘히키코모리(引き籠り, 은둔형 외톨이)’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은둔형 외톨이는 일본의 가장 심각한 사회적 문제 중 하나입니다. 일본 내각부에 따르면 지난 2016년 기준 15~39세 은둔형 외톨이는 54만1000명입니다. 하지만 40세 이상을 포함할 경우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2010년 조사에서 35~39세 은둔형 외톨이가 전체의 23.7%를 차지했었기 때문입니다. 산케이신문은 지난달 27일 사회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의 고령화 문제가 심각하다고 전했습니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점차 이들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지난달 29일 후생노동성 발표에 따르면 일본 전국 지자체 절반가량이 이들의 취업 지원을 포기했습니다. 은둔형 외톨이들이 사회 복귀를 희망하지 않아 지자체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리얼충 대행서비스’는 이 같은 일본의 사회적 현상에서 자연스레 태어난 이색 서비스입니다. 앞으로 어디까지 발전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각에서는 “허울뿐인 어필, 결국은 사기”라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이 서비스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리얼충 대행서비스’를 제공하는 ‘패밀리 로맨스’의 이시이 유이치(35세)씨는 아사히신문과 인터뷰에서 “의뢰자가 서비스를 계기로 적극적으로 사회생활을 이어가게 됐다는 소리를 들어 기쁘게 일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도 최근 ‘나홀로족’ 문화가 크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1코노미’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1인 가구도 늘고 있습니다. 한국의 1인 가구들도 머지않아 리얼충 대행서비스를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해집니다. sijeon@fnnews.com 전선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