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경찰서, 민주·인권 큰 발자취
2018.11.14 17:09
수정 : 2018.11.14 17:09기사원문
대한민국 여자경찰관의 역사는 언제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우리나라 최초의 여경은 1946년 5월 15일 선발됐습니다. 당시 간부 16명과 여경 1기생 64명이 2개월 간의 훈련을 마치고 각각 7월 12일과 8월 12일에 배출됐습니다. 이에 앞서 경무부(지금의 경찰청)는 이들이 임용되기 전인 1946년 7월 1일 경무부 공안국에 여자경찰과를 신설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7년 2월 17일에는 여자경찰조직을 확대해 수도여자경찰서를 비롯해 부산과 대구, 인천 등 4개 대도시에 여자경찰서를 창설했습니다. 여자경찰서를 두지 않은 '관구청'(지금의 지방청)과 경찰서에는 여자경찰계를 설치했습니다.
당시 여자경찰서는 △연령 불문한 모든 부녀자 사건과 △14세 미만 소년 사건 △여자경찰서 소재지에 있어서의 부녀자 수용 등을 주요 임무로 했습니다.
경무부는 여자경찰서 설치를 계기로 부녀자 대상 사건에는 반드시 여경이 동석할 것을 규정하고 남자경찰관의 부녀자 신체수색은 엄히 금지했습니다. 당시 강압적인 경찰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경찰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민주경찰로 변화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여경을 단순히 치안의 보조자가 아닌 여성과 청소년, 인권보호 분야의 전문가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여자경찰서라는 별도의 조직과 기구를 통해 체계적으로 정책이 추진됐다는 점은 당시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가히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역대 여자경찰서장들의 면면을 보면 더욱 놀랍습니다.
초대 서울여자경찰서장 양한나 경감은 중국 상하이와 부산을 오가며 독립자금을 전달했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퇴직 후에도 사회복지 분야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 받기도 했습니다. 제3대 서울여자경찰서장은 안창호 선생의 조카딸이자 독립운동을 하던 중 만삭의 몸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던 안맥결 총경입니다. 그는 최근에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제2대 인천여자경찰서장 전창신 경감은 1919년 함흥지역 3.1운동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였으며 제3대 부산여자경찰서장 이양전 경감은 1920년 일본에서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했던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경감은 아쉽게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대한민국 경찰사에 의미있는 한 획을 그은 여자경찰서는 일반경찰서와 관할 중첩 등의 이유로 1957년 7월 폐지됐습니다.
kim091@fnnews.com 김영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