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마술계 유일한 잡지를 만든다

      2019.04.20 23:56   수정 : 2019.05.31 22:56기사원문
3년에 한 번 열리는 피즘(FISM)이란 대회가 있다. 세계마술연맹(The Federation International of Magic Societies)이 주관하는 일명 ‘마술계의 올림픽’이다.

바로 그 피즘 스물일곱 번 째 대회가 지난해 부산에서 있었다.

대회 참가를 위해 세계 50여 개 나라 2300여명의 마술사가 한국을 찾았고, 마술을 사랑하는 전 세계인의 관심이 부산에 쏠렸다. 적어도 2018년 7월만큼은 부산이 세계 마술계에서 가장 뜨거운 도시였다.


그런데 한국인 대다수는 피즘을 알지 못한다. 몇 달 앞서 있었던 호주오픈 테니스대회에서 정현이 4강에 진출한 소식은 모두가 들어봤지만,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피즘과 이곳에서 거둔 한국 마술사들의 성취를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서 마술이 갖는 지위다.

이은결·최현우 같은 선배세대 마술사들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피즘에서 주목할 만한 상을 휩쓸었다는 차세대 마술사들은 제 이름 건 마술공연 하나도 갖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한국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마술사들은 저를 알아주는 해외시장으로 나가거나 한국 무대에서 고전하거나 둘 가운데 하나의 선택을 내려야 한다. 2009년 한설희(매니퓰레레이션 1위), 2012년 유호진(아시아 최초 그랑프리), 2015년 김영민(제너럴 1위) 등이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정작 한국에서 마술이 처한 상황은 얼마 나아지지 않았다.

■한국 유일·최장수 마술잡지 편집장



‘플레이어’는 불만스런 현실을 딛고 저 높은 곳을 꿈꾸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그런 이들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국내 유일의 마술잡지 <아르카나>를 만들어온 박중수 편집장을 플레이어 다섯 번째 인터뷰 주자로 선택한 것도 그래서다.

박 편집장은 지난 2015년 1월 첫 호를 낸 이래 현재까지 격월간 잡지 <아르카나>를 이끌어왔다. 이 기간 동안 <아르카나>는 국내 유일·최장수 마술잡지란 타이틀을 얻었다.

마니아가 곧 팬으로 통하던 마술계에서 잡지를 출간한 건 누가 봐도 쉽지 않은 선택이다. 이에 대해 박 편집장은 “독특하게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잡지도 크게 보면 창업이고 당시 다니고 있던 학과도 경영학과라서 완전히 다른 길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세계에서 한국 마술이 차지하는 지위가 결코 낮지 않고 한국 마술을 좋아하는 해외 팬들도 많이 있는 상황인데, 마술잡지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 마술이라지만 국내 시장을 들여다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이은결과 최현우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시장이 형성돼 있지 않아 마술사 대부분은 생활을 꾸려가기조차 만만찮다. <아르카나>가 첫 선을 보이기까지 두세 차례 잡지가 만들어졌다 이내 폐간됐으니 이곳 상황은 따져보지 않아도 훤하다.

<매직 매거진> 같은 해외 유명 마술잡지도 폐간하는 세상이다. 마술보다 훨씬 장사가 잘 되는 분야의 내로라하는 잡지도 경영난에 시달린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잡지 가운데 하나인 <카이에 뒤 시네마>가 매년 큰 적자를 내다 <르몽드>로 넘어간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어디 이뿐이랴.

이에 대해 박 편집장은 “마술 마니아로서 한국에서 마술잡지가 창간됐다 사라지는 과정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안타깝기도 했고 다들 왜 성공시키지 못하는지 오기 같은 것도 들었다”며 “처음엔 당장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만 했고,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잡지를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설명했다.

■'쟤는 뭔데 잡지 만든다고 설치나' 텃세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안정된 직장에 취업하는 동기들을 보며 불안한 마음도 들었을 테다. 잡지를, 그것도 오프라인으로 발행한다는 건 누가보아도 큰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니 더욱 그렇다. 이에 대해 박 편집장은 “대학교 졸업할 때쯤 무얼 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남 밑에 들어가 일벌레처럼 살기는 싫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며 “우선 할 수 있는 걸 직접 해보자는 생각을 했고, 그게 <아르카나>가 됐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만든 잡지가 어느새 5년을 이어왔다. 격월간 발행으로 연 6회, 현재까지 26호가 박 편집장을 통해 세상과 만났다. 잡지를 펼쳐드니 얼기설기 짜인 첫 호부터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최신 호에 이르기까지 박 편집장이 건너온 길이 눈앞에 훤히 펼쳐졌다.

박 편집장은 그 길 가운데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피즘 대회를 꼽았다. “마술 올림픽이라 불릴 정도로 큰 대회인데 2018년엔 부산에서 열렸다. 2012년과 2015년에 한국 마술사들이 굉장히 많은 상을 받았고 해외에서도 큰 이슈가 됐는데, 그걸 기리기 위해 2015년과 2018년 대회가 있었던 달 표지를 트로피로 장식한 게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박 편집장은 잡지를 함께 만드는 오해석 마술사·조승우 에디터와 함께 지난해 피즘 대회를 현장에서 취재하는 값진 경험을 하기도 했다.

즐거움 이면엔 언제나 괴로움이 있다. <아르카나>의 오늘도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한 결과일 게 분명하다. 어려웠던 순간을 묻자 박 편집장은 처음 잡지를 만들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박 편집장은 “잡지를 내기 위해 편집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처음 잡지를 시작하기 전까지 전혀 편집기술을 알지 못했다”며 “2015년 1월 첫 호를 내고 싶었기에 한 달 정도 되는 시간 동안 인터넷을 뒤져 미친 듯이 기술을 익혔는데, 그 때가 참 어렵고 즐거웠던 순간”이라고 떠올렸다.

텃세 아닌 텃세도 극복해야 했다. 박 편집장은 “처음 잡지를 시작한다고 홍보했을 때 몇몇 마술사분들이 ‘쟤는 뭔데 잡지를 한다고 설치냐’ 이런 말을 했다고 들었다”면서 “그땐 그냥 대학생이었으니까 그렇게 보였을 수 있지만, 속에선 ‘그럼 지들이 만들지 왜 내가 만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다행히 5년을 이어온 지금의 <아르카나> 앞에 그런 말을 내뱉을 무모한 마술사는 더는 없는 듯하다.

이밖에도 박 편집장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첫 호를 내고 이어서 나온 2·3호가 100부 남짓밖에 나가지 않았던 순간, 홍보채널을 잘 몰라 판매에 고전했던 상황 등을 회상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현재 <아르카나>는 200명이 넘는 고정 구독자를 포함, 평균 400부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아직은 60점... 100점 되는 그날까지



경제적인 면에 한정하면 <아르카나>는 아직 안정적인 잡지라고 보기 어렵다. 잡지를 만드는 필수인력들이 잡지를 통해서만은 생활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박 편집장은 “아직까지 수익에 대한 욕심보다는 잡지 자체에 대한 욕심이 크다. 소소히 살더라도 우리 잡지를 모두가 알고 기억할 만한 잡지로 만드는 게 우선”이라며 “첫 호를 100점 만점에 10점으로 치면 지금은 60점 정도 수준인데, 아직 부족한 게 많아 계속 노력하는 중”이라고 의욕을 보였다.

<아르카나>는 어느덧 박중수란 인간의 삶이 됐다. 자연히 <아르카나>가 거둔 성취는 박 편집장 개인의 성취와 직결된다. 박 편집장은 “언젠가 한국 모든 마술인이 우리 잡지를 통해 의견을 표출하고 공연을 홍보하기를 기대한다. 잡지에서 언급하는 내용이나 공연 리뷰도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거창하진 않지만 마술용품 가게에 갔을 때 테이블에서 우리 잡지를 보며 마술을 따라하고 인터뷰를 읽는 학생들을 본 적이 있다”며 “그때 참 기분이 좋았다”고 웃어보였다.

박 편집장은 올해 중 결혼을 앞두고 있다. 한양대학교 재학 시절 연합 마술동아리에서 만난 여성이 예비신부다. 마술이 맺어준 인연이다. 박 편집장의 결혼소식을 들은 어느 짓궂은 잡지 구독자가 박 편집장을 표지모델로 세운 호가 발간되길 기대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현실화 가능성에 대해 묻자 박 편집장은 “당치도 않다. 그것만큼은 편집장 직권으로 허용하지 않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독자들의 성원이 있다면 달라질 수 있는 일이다. 한국 마술계에 유일한 잡지를 발행하며 매 호를 전보다 낫게 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는 박 편집장보다 한국 마술계에서 주요한 인물을 나는 얼마 알지 못하니 말이다.

앞서 적었듯 한국 마술계는 뛰어난 인재들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시장성에 고전하고 있다. 이은결·최현우란 스타가 앞서 나갔지만, 이들의 뒤를 따를 수 있는 방안이 뚜렷하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관심이다. 관심이 없어 공연이 없고 볼 기회가 없으니 관심이 생기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마술이 가진 본연의 매력과 마술을 향유하는 이들의 열정이 마술계에 작지만 중요한 씨앗들을 뿌리고 있다. 언젠가 비가 내린 사막에 화사한 꽃밭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기사를 읽은 일이 있다. 사막 같은 한국 마술계에도 한바탕 비가 내린다면, 눈부신 꽃밭 얼마쯤엔 분명 <아르카나>의 지분이 있을 것이다.

[가끔 상상합니다. 비디오가게 점원 타란티노를, 차고 안의 잡스를, 아를의 반 고흐를 만나는 순간을요. 연습구장에서 땀 흘리는 메시를, 취재에 치이던 트웨인과 헤밍웨이를 만나는 건 또 어떨까요. 상상만으로도 짜릿합니다. 저도 한 때는 예술에 삶을 걸겠다고 맹세했었지요. 어찌나 즐겁고 괴로웠는지, 얼마나 뜨겁고 슬펐던지를 기억합니다. 꼭 한 번이라도 그 시절 나를 만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기획했습니다. 만날 가치가 있는 사람을 만나 들을 가치가 있는 얘기를 듣는 인터뷰 프로젝트를요. '플레이어'라 이름붙인 이 길 위에서 애저녁에 떠나가버린 나와 만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조건은 오로지 셋입니다. 꿈이 있을 것, 꿈을 향해 달리고 있을 것, 매력적일 것. 플레이어가 이름을 얻지 못한다 해도, 필요한 곳에 조그마한 힘이라도 건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럼 제 인생의 플레이어일, 제 삶 가운데 투쟁하고 있을 멋쟁이 꿈돌이들에게 이 인터뷰를 바칩니다. 지긋지긋한 이 生을, 어디 한 번 살아내 봅시다.
]

팟캐스트 <김성호의 블랙리스트> <김성호의 플레이어>에서 더 깊은 인터뷰를 만날 수 있습니다.

pen@fnnews.com 김성호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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