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명 죽음을 장르영화로... 선 넘었다
2019.05.18 09:59
수정 : 2019.05.18 09:59기사원문
그중 하나는 실재했던 죽음이 장르적 소재로 소비되어선 안 된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실재했던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축소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원칙을 모두 깨부순 영화가 이달 8일 개봉했다.
영화는 2008년 11월 있었던 인도 뭄바이 연쇄테러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피해가 발생한 타지마할 호텔 테러가 중심이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보트를 타고 뭄바이에 들어온 10명의 테러범을 비춘다. AK-47·AK-103·수류탄 등 대량살상이 가능한 무기를 가진 이들은, 뭄바이 시내에서 사람들이 모일 법한 곳을 돌며 무차별적 테러를 감행한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던 손님들이 총격에 죽어나가고 역과 거리에서 연달아 폭탄이 터진다. 일부 시민과 여행객들이 쫓기듯 호텔로 대피하지만 그곳 역시 안전하지 않다. 테러범들은 호텔을 장악하고 투숙객 사냥에 나선다.
치안당국은 속수무책이다. 자동소총에 대항해 리볼버 권총 몇 자루와 몽둥이를 꺼내드니 상대가 될 리 없다. 사건 발생 한참이 지나서야 대테러부대가 출동하지만, 출발한 기지가 델리 지역이란다. 인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아연실색할 소리다. 델리에서 뭄바이까진 대략 1400km, 서울에서 부산의 세 배 거리다.
영화는 대부분의 시간을 테러범들이 아무 제지 없이 사람들을 쏘아 죽이는 장면에 할애한다. 일방적인 학살극이며 잔혹한 테러행위다. 사람들은 호텔직원들의 도움으로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곳에 숨거나 탈출을 도모하지만, 테러범이 장악한 호텔 안에서 완전히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재난영화의 문법으로 실화를 다뤘다
아내와 어린 아기를 살리려는 아버지와 애인과 함께 도망치려 노력하는 여행객,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호텔에 남기를 선택한 직원들의 노력이 지켜보는 이를 숨죽이게 한다. 호텔에 갇힌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해야 한다는 쪽과 구조대가 올 때까지 숨어있어야 한다는 쪽으로 갈려 갈등을 빚고, 누군가는 그저 무슬림이란 이유로 타인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감당키 어려운 위기 속에서 누군가의 리더십이 빛나고 다른 누군가의 무능이 강조된다.
테러범들의 정체도 조금씩 드러난다. 영화가 테러범들의 얼굴과 표정, 이들이 나누는 대화, 심지어는 파키스탄 본부의 지시까지를 그대로 잡아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장난을 걸고, 누군가는 짜증나는 상황에 화를 내며, 또 누군가는 본부가 자신의 집에 돈을 보냈는지를 의심한다. 이들은 이슬람 교리를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원리주의자이며, 이교도에 대한 공격이 정당하다고 믿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자, 이제 눈치 빠른 독자는 <호텔 뭄바이>가 어떤 영화인지를 짐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불편함을 느꼈을지 모른다. 부디 그렇기를 바란다.
연출을 맡은 안소니 마라스는 <호텔 뭄바이>를 한 편의 재난영화로 만들었다. 영화의 전개를 뜯어보면 할리우드 불난리의 최고봉 <타워링>이나 물난리의 신기원을 연 <포세이돈 어드벤처> 등 전형적인 재난영화와 얼마 다르지 않다. 위기의 순간 지혜로운 자와 무모한 자가 대립하고,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아내와 아이를 지키려는 간절함이 있고, 나만 살겠다는 비겁함도 있다.
희생자에 대한 애도 없이 산 자들의 파티를...
악당의 손에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가는 과정에선 액션이나 스릴러의 분위기도 느껴진다. 객실에 들어선 테러범을 피해 옷장에 숨은 여자와 그녀가 지켜야 할 아기를 길게 찍어낸 장면이나 긴박감이 느껴지는 총격전 신의 연출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테러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희생자에 대한 애도를 표하기보다는 극적인 재미에만 집중했다는 인상을 거둘 수 없다.
재건된 호텔에서의 파티장면을 삽입한 선택은 참담하기까지 하다. 여러모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은, <설리>가 비행기 추락 사고에도 탑승객 전원이 생존한 사건이란 점을 고려하면 더욱 불편하게 여겨진다. 어떻게 수백의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을 전원이 생존한 사건과 마찬가지로 다룰 수 있는지, 희생자에 대한 애도 없이 생존자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삽입하려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뭄바이의 비극은 정말이지 이렇게 다뤄져선 안 되는 것이었다. 재난과 액션의 장르적 문법으로 소비되기엔 흘린 피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 사태로 죽음을 당한 이와 가까운 누군가가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제작진이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았다면 결코 이런 영화를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범한 또 하나의 잘못은 테러범의 이야기를 전면에서 다룬 것이다. 이들의 얼굴을 카메라로 잡아내고, 이들끼리의 대화, 심지어는 테러범 중 한 명이 제 아버지와 했던 통화까지를 영화에 담은 선택이 다분히 의도적이고 편향적이어서 불온하게까지 느껴졌다. 이들의 대화 모두가 실제가 아닌 만들어진 것이란 점은 더욱 불쾌한 지점이다.
넘어선 안 될 선, 잊어선 안 될 원칙
민간인에 대한 테러는 결코 용인될 수 없는 문제이지만, 그 이면에 있는 이야기를 끌어와서 영화로 다루는 건 또 다른 문제다. 특히 파키스탄과 인도가 오랜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상태로, 테러를 일으킨 '라쉬카르 에 타이바(Lashkar-e-Taiba, LeT)'를 사실상 파키스탄이 지원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파키스탄과 인도의 뿌리 깊은 싸움, 즉 카슈미르 영유권 분쟁이 뭄바이 테러의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카슈미르 분쟁은 복잡한 문제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주민투표에 따라 카슈미르 지역의 미래를 결정키로 했던 원칙을 인도가 파기하면서 비롯됐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이러한 갈등은 이후 수차례의 분쟁과 핵개발, 급기야는 전력상 열세에 놓인 파키스탄의 테러단체 지원으로까지 이어졌다. 테러 이면에 식민제국주의와 인도의 패권주의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분쟁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는 호주와 영·미권 자본으로, 인도의 협력을 얻어 만든 <호텔 뭄바이>가 테러범을 다루는 방식이 가관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본부의 '누군가'에게 버려지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이고, 세뇌되어 있는 불쌍한 어린 것들이다. 이들을 세뇌시킨 파키스탄은 '악' 그 자체이며, 인도와 희생된 여행자들의 조국은 피해자일 뿐이다.
이것이 영화가 비극을 소비하는 정당한 방식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이 테러집단과 그를 지원하는 국가를 옹호하는 것으로 읽힐까 겁이 난다. 결코 그런 의도가 아니다. 그저 한 편의 영화가 실재했던 이야기와 여전히 살아 있는 문제를 다룰 때 넘어선 안 되는 선과 잊어선 안 되는 원칙이 있음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건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다. 오늘 우리는 그들의 영화를 보고 있을 뿐이지만, 내일은 우리가 그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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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fnnews.com 김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