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PD, 몰래 카메라로 엿보다
2020.08.03 17:44
수정 : 2020.08.03 17:45기사원문
분노한 흑인들은 백악관 앞까지 몰려가 절규했다. 그날 밤, 구보씨네 담장 너머서도 절규가 터져 나왔다.
구보씨는 그 구슬픈 울음을 엿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기묘한 점은 베트남 새댁이 실컷 운 뒤엔 꼭 베트남 말로 한참을 '웅얼웅얼' 거린다. 푸념 같기도, 기도 같기도 한 그 웅얼거림을 구보씨는 한 달에 서너번은 꼭 듣는다. 도대체 왜 그럴까.
한달 전 실마리가 풀렸다. 그날은 색시가 나무 밑에서 울고 있는데 화가 덜 풀린 남편이 뛰어나와 창문 밑에서 고함을 질렀다. 저간의 사정은 이러하다. 며느리가 시어머니 점심상을 차려놓고 외출을 했다. 경로당에서 돌아온 시어머니가 질겁해서 아들에게 전화로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니 색시년이 나 일찍 죽어라고 제사를 지낸다. 빨리 와서 점심상 꼴 좀 보거라." 아들이 달려왔다. 점심상 숟가락이 '거꾸로' 엎어 놓여 있다. 화가 난 남편이 손찌검을 했고, 놀란 새댁이 도망을 나왔다. 분이 덜 풀린 남편 녀석이 쫓아 나와 왜 숟가락을 엎어 놓았느냐고 계속 윽박지르니, 울기만 하던 새댁 겨우 하는 말.
"어머님 숟가락에 먼지 앉을까봐서요." 한 달 전의 일이다.
이번에도 색시는 한참 울고 난 후 꼭 웅얼거릴 것이다. 구보씨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웅얼웅얼'을 녹음했다. 베트남 사는 조카에게 파일을 보내서 알아내고 말 테다. 며칠 후 베트남에서 온 답신을 본 구보씨, 컴퓨터를 탁! 치며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집 새댁 웅얼거림은 바로 구보씨 '좌우명'이었다. 구보씨가 책상 앞에 붙여놓고 매일 읊조리는 시(詩).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그날부터 구보씨는 옆집 남편 녀석을 며칠간 노려보다가 어느 날 출근길을 막아서며 손을 내밀었다.
"자네 마누라가 제일 좋아하는 시(詩)를 액자로 만들어왔네. 지난번 베트남 커피 답례네." "제 마누라 가장 좋아하는 시를 어떻게 아세요." "이 사람아, 내 창문 밑에 와서 한 달에 수십번씩 암송을 하니 알지!" "??"
구보씨는 집으로 돌아오며 큰소리로 시를 읊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서러움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한순간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추억이 되리니-푸시킨
한 달이 흘렀다. 담장 너머 새댁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옆집 남편 녀석 고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날 후, 남편 녀석은 구보씨를 만나면 90도 인사를 한다. 그날 후, 구보씨 동네 필리핀, 캄보디아, 멀리 아프리카에서 온 여인들도 90도 인사를 한다. 구보씨도 겸연쩍어 무릎을 90도로 꿇을 수밖에 없다. 오늘도 미국TV에서는 '흑인 인권도 소중하다'는 절규가 터져 나온다.
이응진 경기대 한국드라마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