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억씩 들인 골목, 소방차도 못 세운다

      2020.09.07 17:53   수정 : 2020.09.07 19:36기사원문
"도로가 좁고 불법 주정차가 많아 구급차가 빠져나가기조차 힘들어요. 환자가 생기면 들것만 들고 언덕을 올라와야 해요. 불이 나면 소방차도 못들어와요. 왜 재개발이 필요한 우리 동네를 도시재생지구로 지정했는지 모르겠어요."

지난 4일 도시재생 활성화지구인 서울 창신동에서 만난 주민 김모씨는 서울시의 도시재생사업 추진 5년의 성과를 묻자 이렇게 푸념했다.

2015년 창신·숭인동을 시작으로 출범한 서울 도시재생 활성화사업이 최근 정부의 공공재개발 추진을 계기로 기로에 서게 됐다. 지난 5년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낙후지역 일자리 활성화, 역사문화 특화 등의 긍정적인 성과에도 일부 지역들은 "주거환경 개선효과가 없는 사실상 실패한 정책"이라는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도시재생지역 간에 명암이 갈리고 있는 것이다. 도시계획 전문가들은 "지역 특성에 대한 세밀한 고민 없이 도시재생을 추진한 정부의 접근법이 낳은 결과"라고 지적했다.

도시재생지구, 평가 극과 극


파이낸셜뉴스가 지난 2~7일 서울 주요 도시재생사업지구들을 취재한 결과 지역주민들의 평가는 크게 엇갈렸다. 실제로, 도시재생 선도사업지역인 강동구 암사동은 긍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이곳에서 도시재생기업을 운영 중인 김한주 대표는 "독서 모임을 유료로 진행하던 공간이 너무 노후돼 아이들의 안전을 위한 보험도 들기 어려웠다"며 "암사1동이 도시재생 지역임을 알게 돼 앵커시설(핵심 자족시설)을 이용해 교육을 진행하고, 지역민들이 도시재생의 혜택을 받도록 지원해 호응이 높다"고 말했다.


용산구 해방촌 신흥시장은 기존 니트산업과 청년 예술공방을 결합한 '공동판매장'을 조성하고 연내 노후시설의 현대화를 완료해 '아트 마켓'으로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의 대표적 낙후지역인 해방촌은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올해만 105건의 집수리 지원도 이뤄져 주민들의 공감도가 높았다.

반면 도시재생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지역들도 즐비하다. 전국 1호 도시재생사업지역인 창신·숭인동을 비롯해 상도4동, 장위동, 가리봉동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지역 주민들은 한결같이 기대했던 주거와 도로정비 대신 벽화와 페인트칠로 끝난 도시재생에 실망감이 가득했다. 상도4동에서 38년간 거주한 염모씨는 "집 앞 축대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우리 집 아이들만 좋아한다"며 "태어날 때부터 있던 축대인데 벽화 대신 보강을 해주는 게 더 낫다"고 지적했다. 장위13구역의 한 공인중개사는 "이 구역이 엄청 넓은데 도로 확보는 극히 일부만 진행되고 주차 공간은 전혀 확보되질 않았다"며 "도시재생 효과를 전혀 모르겠다"고 씁쓸해했다.

가리봉동 주민 박모씨는 "예전엔 동네 도로에 버스가 양방향으로 오가는 게 가능했다"면서 "지금은 집마다 차가 늘어나 불법주차로 버스가 한 방향으로만 다녀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다"라고 하소연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협의매수와 수용을 통해 (도시재생지구의) 도로를 낼 사유지를 매입하고 있지만 도로 하나당 수십 세대를 사들여야 해 사업 속도가 더디다"며 "차가 못 들어가는 골목들은 최근 조례 개정을 통해 주차장 설치비용을 납부하지 않고 건축이 가능하도록 규제를 완화했다"고 밝혔다.

"미흡지역 출구 열어줘야"


도시재생사업의 효과가 엇갈리는 건 서울시의 정책적 접근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도시재생이란 주택, 도심, 공장을 다 아울러 도시를 재생산하는 건데 현 정부는 개념을 축소시켜 '마을 만들기'에 치중하고 있다"며 "지방의 중소도시에 어울릴 만한 도시재생을 서울 창신동 등에 집중하고 있으니 수백억원을 쏟아부어도 골목길은 여전히 좁고 공장과 주차장 신설 효과는 미미하다"고 주장했다.

김호철 단국대 도시계획·부동산학부 교수는 "도로정비는 워낙 예산이 많이 필요해 주민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서도 "도시재생을 만병통치약의 수단으로 인식하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창신동 등 사업이 진행 중인 일부 도시재생지구들이 정부가 8·4 대책으로 내놓은 공공재개발 참여를 타진 중이지만 서울시는 '불가'라는 입장이다.
지난 1일 '도시재생법 시행령' 개정으로 공공재개발사업이 도시재생 인정사업에 포함됐지만 사업이 진행 중인 도시재생 활성화지구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도시재생 성과가 미흡한 지역들은 출구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도시재생지구 관계자는 "도시재생 사업지 내 일부 구역은 법적으로 실질적인 건축행위가 불가능한 지역이 여전히 존재한다"며 "개별건축행위와 소규모정비사업에 대한 전향적 규제완화나 공공재개발 등의 우회로를 터줘야 한다"고 말했다.

hoya0222@fnnews.com 김동호 기자 , 김지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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