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신들의 씨를 말리다 '무신정변'
2021.06.19 01:20
수정 : 2022.02.21 12:32기사원문
10세기 이후 '문치주의'(文治主義)를 근간으로 하는 고려 사회를 뿌리채 뒤흔드는 정변이 발생했다.
무신정변 이후 고려 사회는 100년에 이르는 엄혹한 '무신집권기'에 들어갔다. 정제되지 못하고 거칠었던 무신 세력들은 힘으로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했고 왕권을 유린(蹂躪)했으며 상호 간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이기 일쑤였다. 이에 따라 무신집권기 동안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최고 권력자는 계속 바뀌면서 고려 사회는 좀처럼 혼란의 도가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문신들의 씨를 말리며 고려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었던 '무신정변' 전말을 되돌아봤다.
■고려 사회의 문치주의
태조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 할 때 그 주변에는 건국에 일조한 수많은 무신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른바 '공신'(功臣) 세력을 형성해 갓 태어난 고려 왕조의 중심에 위치했다. 심지어 2대 왕 혜종(惠宗)과 3대 왕 정종(定宗) 교체기에 무신들이 대거 동원돼 정치적 변화를 주도하며 그 영향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4대 왕인 광종(光宗) 대에 이르러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비대해진 무신들의 영향력을 제어하기 위해, 중앙정치 무대에서 무신들을 배제하고 문신들을 대거 등용하거나 요직에 앉혔다. 문신들의 대표적인 정계진출 통로인 '과거제'(科擧制)도 이 때 처음 시행됐다. 이로써 '문치주의'(文治主義)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후 조정에서 문신들은 비단 자신들 본연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닌 무신들의 영역도 잠식(蠶食)했다. 고려 시대 군사를 맡아보던 관청인 병부(兵符)의 고위직도 문신들이 차지했다. 기실 외침이나 내란을 평정하면서 유명해진 강감찬, 윤관, 서희 등도 모두 무신이 아닌 문신들이었다. 문무의 양권을 손에 쥔 문신들은 경제력도 독점해나갔다. 문신들은 대외 무역 등을 통해 부를 계속 축적했고, 심지어 백성들의 토지를 마음대로 갈취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토지를 빼앗겨 '유리걸식'(流離乞食)하는 백성들이 급격히 증가했다.
■무신들의 수모와 거사 모의
문신들의 전성기는 무신들에게는 '재앙'(災殃)과도 같았다. 우선 문무를 넘나들며 요직을 꿰찼던 문신들과 달리 무신들은 정2품 이상의 관직은 감히 넘볼 수도 없었다. 정3품 상장군이 무신들이 올라갈 수 있었던 관직의 최대치였다. 더욱이 과거제인 문과(文科)를 통해 정식으로 등용되는 문신들과 달리 무신들은 이와 비슷한 무과(武科)도 없어 태생적인 한계를 노정(露呈)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왕이 궁궐 밖으로 나가 문신들과 연회를 할 때, 무신들은 여기에 결코 참여하지 못했고 그저 호위병의 역할만 수행해야 했다. 그나마 최고 관직이었던 상장군도 이 역할에 그쳤다. 특히, 당시 고려의 18대 왕이었던 의종(毅宗)은 주색(酒色)을 밝혀 시도 때도 없이 연회를 열며 무신들을 호위병으로 부렸다.
상황이 이렇자 당시 무신들과 그들의 중심 인물이었던 상장군 정중부, 견룡행수(牽龍行首) 이의방, 이고 등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결국 이들은 거사를 모의하기에 이른다. 1170년 4월, 의종이 화평재(和平齋)로 행차했을 때 경치 좋은 곳에 다다르자 문신들과 또 다시 연회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 때도 무신들은 상장군부터 일개 병사 할 것 없이 호위병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정중부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이의방과 이고는 뒤쫓아가 정중부에게 거사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피력했다. 문신들은 밤새 마시고 배불리 먹고 있는데, 무신들은 굶주리고 피곤한 세월이 계속되고 있으니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중부도 이 주장에 적지 않게 공감했다. 정중부 본인도 이전에 문신인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으로부터 수염이 촛불로 태워지는 수모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중부는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보고 숙고(熟考)하자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무신정변
화평재 행차 이후에도 의종의 사치스러운 연회는 자주 열렸고, 문신들의 오만함과 무신들의 수모는 계속됐다. 이전과 비교해 상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의종의 총애에 기대 함부로 나대는 환관 한뢰와 임종식 등의 '안하무인'(眼下無人)적인 행태는 더욱 심화됐다.
결국, 1170년 8월에 정중부는 이의방, 이고 등을 불러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거사 당일 의종은 개경의 덕적산 남쪽에 있는 흥왕사(興王寺)로 행차했다. 정중부와 이의방 등은 의종이 흥왕사에서 궁궐로 바로 환궁한다면 일단 거사를 미루겠지만, 만약 보현원(普賢院)으로 이동한다면 그 곳에서 거사를 단행하기로 합의했다.
고려의 운명의 여신은 후자를 택했다. 의종은 보현원으로 이동하기로 했고, 오문(五門) 앞에 이르러 갑자기 무신들로 하여금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하라고 명했다. 오병수박희는 무신들 간에 무예를 겨루는 대회였다. 물론 문신들은 의종과 함께 술을 마시며 이를 즐겁게 관전할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해야 할까. 바로 이 자리에서 사실상 무신정변의 직접적인 도화선(導火線)이 되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대장군이었던 이소응이 오병수박희에 참가했는데, 이소응이 대회 도중 힘에 부쳐 뒤돌아섰을 때 환관인 한뢰가 그 앞에 나와 패기가 없다며 노장군의 뺨을 후려쳤다. 물리적인 충격으로 이소응은 섬돌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의종과 문신들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임계점(臨界點)을 넘어선 무신들은 당장이라도 칼을 뽑으려고 했지만, 정중부는 일단 눈짓으로 말리고 한뢰 앞으로 가서 "정3품 벼슬인 이소응에게 너 같은 사람이 모욕을 주느냐"며 크게 꾸짖었다. 이에 놀란 의종이 직접 정중부를 진정시키며 오병수박희에서의 상황은 종료됐다.
하지만, 이제 주사위는 던져 진 셈이었다. 저녁 무렵 의종이 보현원에 이르자 마침내 이의방과 이고는 행동에 들어갔다. 그들은 우선 왕명이라고 기만하며 순검군(巡檢軍)을 집합시켰다. 의종이 보현원 내부로 들어간 후 나머지 신료들이 각자의 처소로 물러나려 할 때, 순검군을 동원한 이의방과 이고는 그 자리에서 임종식과 이복기 등 신료들을 대거 척살했다. 이를 본 한뢰는 곧바로 보현원 내부의 의종에게 달려가 왕의 침상 아래로 숨었다.
의종이 보현원 내부로 진입한 무신들을 막으려 했지만, 무신들은 한뢰를 내놓을 것을 의종에게 요구했다. 의종의 용포(龍袍)를 잡고 버티던 한뢰는 이고가 휘두른 칼에 즉사했다. 이에 의종 곁에 있던 문신들이 감히 왕 앞에서 무력을 행사한다며 책망하자, 더욱 격분한 무신들은 "문신의 관(冠)을 쓴 자는 비록 서리(胥吏)일지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고 외치며 의종 곁에 있던 문신들을 모조리 척살했다.
보현원에서의 거사가 성공하자 이의방, 이고 등은 곧바로 개경으로 쳐들어갔다. 무신들은 죄인 등을 다스리는 관청인 가구소(街衢所)에 있던 별감(別監) 김수장을 죽였고, 궁궐에 있던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양순정, 판이부사(判吏部事) 허홍재를 비롯해 수많은 관료들을 척살했다.
뒤이어 의종과 태자를 폐위했고 의종의 둘째 동생인 익양공(翼陽公) 호(晧)를 즉위시켰는데, 이가 바로 고려의 제19대 왕인 명종(明宗)이다. 이로써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 등이 중심이 된 무신정변은 성공했고, 약 100년에 이르는 엄혹한 무신집권기가 시작됐다.
■100년 무신집권기
무신들이 권력을 잡은 후 왕정(王政)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반(反) 무신 항쟁이 일어났다. 1173년에 동북면병마사 김보당과 그 이듬해에 서경유수 조위총이 일으킨 항쟁이 그것이다. 또한 사찰 승려들이 무신정권에 대항해 항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항쟁들은 이의방의 부하인 이의민 등의 활약으로 진압됐다.
100년에 이르는 무신집권기의 특징은 왕권의 '유명무실'(有名無實)과 집권한 무신이 중방(최고 무신들로 구성된 회의 기구), 도방(경대승이 설치한 사병집단이자 숙위기관), 교정도감(최충헌이 설치한 최고 권력 기구), 정방(최우가 설치한 인사담당 기관) 등과 같은 기구를 통해 모든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최고 권력자들이 자주 교체됐다. 무신집권기 초반의 최고 권력자는 정변 당시 견룡행수였던 이의방이다. (참고로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은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의 6대 조였다.) 이의방은 정변 동지였던 이고 등을 죽이고 정중부를 밀어낸 후 권력을 장악했다. 이의방은 자신의 딸을 명종에게 시집 보내는 등 국정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하지만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의 계략에 걸려들어 피살됐고, 이후 정중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이의방 시대와 다를 바 없이 정중부 시대에도 정중부 자신과 그 아들들의 국정 농단 등이 횡행했다. 이에 청년 장군이었던 경대승이 등장해 정중부와 정균 등을 기습해 척살한 후 권력을 잡았다.
다만, 경대승의 경우는 이의방, 정중부와 달랐다. 경대승의 거사 이유는 왕권을 유린한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권력을 잡은 후 경대승은 왕권을 어느 정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의종을 죽인 이의민을 끝까지 찾아내 척결하려는 의지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경대승 역시 신변의 위협을 느꼈고, 끝내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했다.
경대승이 죽자 이번에는 변방에서 숨죽이고 있던 이의민이 나타나 권력을 장악했다. 이의민 역시 자신의 상관이었던 이의방처럼 '전횡'(專橫)을 일삼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의민과 그 아들들의 전횡을 참지 못한 최충헌, 최충수가 거사를 일으켰고, 이의민 등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최충헌은 이전 권력자들과 달리 무려 4대(최충헌-최우-최항-최의) 62년(1196년~1258년)에 걸쳐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른바 '최씨 무신정권'의 시대를 연 것이다. 최충헌은 비단 무신 뿐만 아니라 문신들도 고루 등용해 자신의 세력 기반을 공고히 했다. 또한 명종과 희종(熙宗) 등 왕을 마음대로 '폐립'(廢立)하기도 했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아들 최우 등은 강화도에서 대몽(對蒙) 항쟁을 주도했다.
최씨 무신정권은 최의 대에 이르러 종말을 고했고, 이후 김준과 임연, 임유무 부자가 잇따라 권력을 잡았다. 임유무는 대몽 항쟁 당시 친몽파인 원종(元宗)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다 원종에 의해 제거됐다. 임유무를 끝으로 비로소 길고 엄혹했던 무신집권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고, 1270년 드디어 왕정이 복고됐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