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언양 장날 발생한 살인사건..성냥개비 하나가

      2022.01.22 09:00   수정 : 2022.01.22 09:0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울산=최수상 기자】 1927년 울산 언양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전시회가 울산대곡박물관에서 열리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지금처럼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없었던 시절, 울산 한 산골의 숯장수가 성냥개미 하나가 발단이 돼 어이없게도 일본인의 발에 차여 죽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지역뿐만 아니라 서울까지 번졌다.

울산대곡박물관은 당시 이 사건이 “민족 차별 사건이다” 또는 “민간에서 흔히 일어난 싸움이다”라는 이견으로 사회·민족적 이슈로 떠올랐다고 설명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이진 것일까?

■ 담뱃불 좀 달라는데 발로 차 죽여
사건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 10월 17일(음력 9월 22일) 오후 3시 월요일 울주군 언양읍 언양장터에서 발생했다.

울주군 상남면 등억리(현 울주군 상북면 등억알프스리)에서 숯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던 34세의 김경도 씨는 언양 장날을 맞아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 장터를 찾았다.


김씨는 일본인 가리야(刈屋·예옥·당시 53세)의 점방 앞에서 숯을 모두 팔고 난 뒤 담뱃불을 붙이려고 점방 안에 있던 가리야의 부인에게 성냥불 하나를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가리야의 부인은 거절하면서 돈을 주고 사라고 했다. 김씨가 돈이 없다며 재차 부탁했지만 돌아온 것은 부인의 욕설이었다. 그렇게 둘 사이에 실랑이가 오가던 중 갑자기 가리야가 뛰어나와 김씨의 뺨을 때리고 밀어 넘어트렸다. 그리고 게타(일본의 나무 신발)를 신은 발로 불알을 걷어차 버렸다.

급소를 맞은 김씨는 극심한 고통에 현장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이를 지켜본 조선인들의 도움으로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걷지도 한 채로 이웃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갔고, 이후 몇 차례 일본인 의사의 치료를 받고도 계속 배가 부풀어 올라 결국 사건발생 5일 만에 숨졌다.


■ 언론보도 잇따라.. 사실왜곡 가짜뉴스도 등장
이후 조선일보는 1927년 10월 24일자 지면에 “일본인이 조선인을 발로 차 죽여(축살·蹴殺)‘, 동아일보는 10월 25일자 지면에 “포악한 일본인이 조선인을 때려 죽여”라는 제목으로 사건을 보도됐다. 신한민보, 중외일보, 부산일보 등도 이 사건을 다뤘다.

신문들은 속보를 통해 사건의 발생 원인과 분노한 조선인들이 일본인 집을 부수다 경찰에 잡혀갔다는 내용 등 후속 보도를 이어갔다.

특히 언양청년회와 울산 동면(현 방어진 일대) 오월청년동맹 등 울산지역 청년회가 앞장서 지역사회에 일본인의 만행을 알리고 살해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한 일 등을 보도했다.


당시 청년회를 중심으로 울산지역 사회단체들은 사건의 전말을 알리고 만행을 성토하는 합동집회(성토대회)를 열려고 했지만 일본경찰의 금지 조치로 열지 못했다.

이 성토대회에서 울산청년회 등 7개 단체는 부산의 A신문사가 가짜뉴스를 통해 “우연히 발생한 싸움”이라며 살인을 저지른 일본인 가리야를 옹호하는 기사를 썼다며 이를 대중에 알리려고도 했다.

대회가 무산되자 청년회는 방법을 바꿔 A신문 사장과 기자에게 경고문을 보내고 기사 취소와 울산지국장에 대한 사직을 요구했다.

■ 살인자 일본인 본국으로 돌아가
이에 대한 A신문사의 후속조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A신문은 이후에도 이 사건을 계속해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일본인 가리야에 대한 첫 공판은 사건 다음해인 1928년 1월 21일에 열렸다. 가리야는 재판에서 범죄 사실을 부인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가리야는 “싸웠지만 찬 기억은 없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속행 재판은 닷새 뒤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렸다. 검사는 징역 5년을 구형했다. 선고는 1월 31일 열리기로 됐다.

보도는 여기서 잠심 중단됐다가 약 5개월 뒤인 5월 31일자 신문을 통해 피해자 김씨의 처와 자녀가 가리야를 상대로 당시 금액으로 8,540원의 위자·손해료 청구소송이 있었고, 가리야는 이에 불복, 항소를 하고 대구형무소에 복역 중이라고 전했다.

가리야는 향후 학계의 연구를 통해 형량을 마치고 한동안 울산과 부산에 머물렸으며 1935년 부인과 모친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간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울산 언양에는 가리야를 포함 일본인 9가구 36명이 거주한 것으로 조사됐다.


■ 아무도 기억 못하는 숯꾼 김경도
울산대곡박물관 측은 “일본인 가리야에 대한 정보는 재언양일본인제호부를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으나 김경도 씨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자료를 확보할 수 없었다”며 “상북면행정복지센터와 등억리 이장에게 문의, 주민들을 탐문했으나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고 밝혔다.

김경도 씨가 살았던 곳은 영남알프스 9봉 중 하나인 신불산이었다.
당시 숯꾼들이 살았던 집터와 숯을 만들었던 가마터가 현재까지 여러 곳 남아 있다.

울산대곡박물관은 이번 전시에서 사건 외에도 숯가마, 언양장 등을 통해 생활상과 일제강점기 울산지역 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민간사회단체들의 저항 활동과 언론보도를 통해 사회상을 전해주고 있다.


한편 울산대곡박물관 특별전 ‘응답하라 1927 언양사건 - 일제강점기 언양 지역사회 이해’는 오는 3월 27일까지 이어진다.

ulsan@fnnews.com 최수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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