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진술 위헌' 1심 실형 받은 성폭력 계부, 원심 깨질까
2022.01.24 18:01
수정 : 2022.01.24 18:01기사원문
■"영상녹화 피해자 진술 신빙성 높아"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동부지법 형사합의12부(박상구 부장판사)는 지난 12월23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모씨에게 징역 8년을 선고했다.
이씨는 2017년부터 의붓딸 A양(현재 16세)을 강제 추행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그는 2019년 겨울 저녁무렵 당시 13세였던 A양에게 "음료수를 마시러 가자"며 자신의 차에 태워 경기도 하남시의 공사 현장으로 이동했다. 이씨는 옷을 벗고 자신의 특정 신체 부위를 만져 달라고 한 뒤 거부당하자 "만져 주지 않으면 네 엄마와 이혼하겠다"며 "네가 목욕하는 모습을 촬영한 것을 학교 홈페이지에 유포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씨는 마찬가지 방법으로 A양에게 유사 성행위도 강요했다. 이씨는 2017년 여름 저녁께 서울 송파구 소재 자신의 주거지에서 당시 11세였던 A양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양손으로 특정 신체 부위들을 만진 것을 비롯해 2018년 A양의 방에 들어가 추행한 혐의도 받는다. 이씨 측은 "2017년에는 어깨를 가볍게 안았을 뿐 특정 신체 부위는 만지지 않았다"며 "(2018년에는) A양을 아내 B씨(45)로 착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A양의 영상 녹화 진술을 바탕으로 "A양은 각 범행이 발생한 일시와 장소, 경위와 방법, 이후의 상황과 당시 느낀 감정 등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꾸며 내기 어려운 사항들을 비교적 구체적이고 일관되게 진술했다"며 "내용에 특별히 비합리적인 부분이나 진술 자체로 모순되는 부분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어 "이씨가 강제 추행 등 범행을 저질렀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같은 날 헌재는 '영상 녹화 진술 증거' 위헌 결정
이씨는 1심 선고에 불복하고 지난 12월31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공교롭게도 1심 선고가 있던 지난 12월 23일 헌법재판소는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 영상 녹화 진술을 증거로 인정하던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30조 6항에 대해 "피고인 반대신문 기회를 제한해 방어권을 침해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헌재 결정에 2차 피해를 우려하는 한편 처벌받아야 하는 가해자가 무죄를 받는 일도 많아질 것으로 비판한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성폭력 사건 재판에서는 성인도 감당하기 힘든 질문이 난무한다"며 "피고인이 피해자에 대해 직접 증인신문을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또 "가해자 목소리를 듣는 순간 피해자의 공포는 커지기 마련"이라며 "겁에 질려 말이 바뀔 수도 있는데 피해자 진술이 일관적이지 않다고 재판부가 무죄를 내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신수경 변호사(법률사무소 율다함)는 "형사소송법상 진술 증거는 판사 앞에서 증인 선서를 하고 말해야 증거 능력이 인정되는데 성폭력 피해자에게는 가혹한 과정"이라며 "피해자가 아동이거나 장애인 등 특수한 경우에는 처음 수사기관 조사에서 영상을 녹화하는 것으로 고통을 덜어 주자는 것이 특례 조항의 취지였다"고 밝혔다.
이 같은 논란에 법조계는 대책 마련에 나섰다.
법원 현대사회와 성범죄 연구회는 지난 10일 '미성년 성폭력피해자 영상녹화진술 관련 실무상 대책' 긴급 토론회에서 "심리 후 피고인이 방어권을 남용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피해자에게 추가 피해를 준 것이니 양형상 불리함을 감수해야 한다"며 "이 점을 피해자 증인신문 전 당사자들에게 환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오선희 법무법인 해명 변호사는 판사와 검사, 피의자, 피해자 변호사가 보호시설 등 피해자에게 친화적인 장소에 모여 질문을 정리한 뒤 전문 수사관에게 묻게 하고 밖에서 지켜보며 녹화와 추가 질문을 하는 '북유럽 방식'을 소개했다.
법무부도 '젠더폭력처벌법 개정 특별분과위원회'를 발족해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위원회는 증인이 재판에 나오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피고인 반대신문권을 보장하는 '유럽인권조약 제6조 지침' 등을 검토한 뒤 향후 대책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glemooree@fnnews.com 김해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