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하고 행동하라, 메르켈처럼

      2022.07.13 18:29   수정 : 2022.07.13 18:29기사원문
1989년 11월 9일 목요일 오후 독일 동베를린. 35세 동독의 과학자 앙겔라 메르켈은 동료들과 세미나를 끝낸 뒤 사우나에서 시간을 보냈다. 거리로 나왔을 때, 국경 검문소는 열려 있었다. 장벽에 오른 시민들의 함성이 쩌렁쩌렁했다.

그때 메르켈이 한 일은 평소처럼 맥주를 마시는 대신 "서쪽으로 걸어간 것"이 전부였다. 메르켈의 16년(2005~2021년) 집권기를 추적해 최근 평전 '메르켈'을 펴낸 프랑스 언론인 마리옹 반 렌테르겜은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과도한 열정은 없었다. 메르켈은 그런 사람이었다."

책은 흥미로운 대목이 상당히 있다. 저자 렌테르겜은 프랑스 시인 아폴레네르의 시구를 인용한다. "마침내, 그대는 이 낡은 세상이 지겹다." 겉으로 무덤덤했던 메르켈은 무너진 베를린 장벽을 보며 물리학을 밀어내고 처음으로 정치를 그의 삶 우위에 두게 된다. 오시(Ossi 동독) 출신 이혼녀로, 당시로선 뼛속까지 비주류였던 메르켈이 권좌에 오를 능력까지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독일 통일의 주역 헬무트 콜 전 총리를 기고문 하나로 무너뜨린 이가 메르켈이다. 1999년 콜의 뇌물수수와 비자금 의혹을 비판하는 메르켈의 글이 보수 일간지에 실린 후 콜의 정치인생도 끝났다. 렌테르겜은 책에 "메르켈은 마키아벨리적 기술과 천재적 정치감각을 발휘한 것"이라고 썼다.

통일 후 이어진 기나긴 저성장과 높은 실업률로 독일이 유럽의 병자로 전락하던 시기 메르켈은 정치 중앙에 섰다. 유럽은 그의 집권기 악재의 연속이었다. 그리스발 재정위기, 중동발 난민, 영국의 브렉시트,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 미국의 트럼피즘 그리고 팬데믹까지. 메르켈이 꺼낸 카드는 '메르켈리즘'의 요체라 할 수 있는 중용과 경청, 타협과 협상, 배려와 포용이었다.

"메르켈은 균형을 찾아 끊임없이 논의하고 협상했고, 원하는 것을 이뤘다"고 말한 이가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이다. 돌아보면 에너지정책이나 대러시아 관계에서 메르켈은 오점을 남겼다. 그럼에도 '여성총리는 삼키기 힘든 알약'이라는 편견을 깨고 독일을 가장 호감 가는 나라로 끌어올린 주역이라는 데 반박하긴 힘들다.

미국 언론인 케이티 마튼은 4년간 각국 정치인을 인터뷰해 지난해 '메르켈 리더십'을 펴냈다. 그는 메르켈의 가치를 실용과 인내, 합의의 정신에서 찾았다. 렌테르겜은 메르켈 주변의 수많은 증언을 종합해 그의 리더십 비밀을 이렇게 규정한다. '서두르지 말고, 분석하고, 행동하라.' 메르켈의 사람들은 "아는 것 이상으로 말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약속하지 말라"는 것을 철칙으로 삼는다. 엘리트 학자 출신 메르켈의 과학적 태도가 그 바탕에 있다.


메르켈의 철학은 이렇게 간추려진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에 넘어갈 것, 기어오르거나 영웅적 반항을 하느라 체력을 소모하지 말 것. 그러면서 적절한 순간을 기다릴 것. 급격한 변화보다 느린 진화를 선호할 것." 이런 점에서 메르켈은 진정한 보수, 동시에 진보적인 보수다.
억지와 과장, 윽박과 진영싸움에 날 새는 줄 모르는 한국 정치가 곱씹어볼 대목이다.

jins@fnnews.com 최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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