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에게 탕약을 올릴 때는 먼저 〇〇에 부어 독(毒)을 확인했다

      2023.07.08 06:00   수정 : 2023.07.08 06:0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조선시대에는 임금을 진찰하는 데 법도가 있었다. 관례에 따른 형식적인 절차 같지만 무척 엄격했다.

임금들은 항상 시해(弑害)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탕약에는 독이 들어갈 수 있었고, 침은 혈자리에 따라 경우에 따라서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임금의 치료는 엄격한 절차에 따랐다. 임금을 진찰하고자 하면 먼저 세 제조가 의관을 인솔하여 입시(入侍)한다. 세 제조는 도제조, 제조, 부제조로 이들 직책은 잡무와 기술, 의학, 천문, 지리 등을 관할하는 고위관직을 말한다. 제조들은 의원이 아니지만 내의원의 의관들을 통솔했다.

임금을 진찰하기 위해서 차대(次對) 시에 입시하면 약방(藥房)이 먼저 들어갔다. 차대란 매달 여섯 차례씩 신하들이 임금 앞에 나아가 국가 행정에 관계된 일을 보고하고서 재가를 받는 일을 말한다. 만약 경연(經筵) 시에 입시하면 경연관이 먼저 들어갔다. 경연은 임금이 경전(經典)을 공부하는 자리를 말한다.

먼저 도제조가 문후(問候)를 드린 후 진맥을 청한다. 보통 진맥은 이른 아침에 시행하는데, “기체후(氣體候)는 어떠하십니까? 지금 의관들이 대령하여 진맥하고자 합니다.”라고 하고, 임금이 윤허하면 의관들이 차례로 입진(入診)한다.

만약 임금이 교의(交椅, 왕의 의자)에 앉아 있다면 좌측에 서서 큰 절을 하고서는 임금의 왼손을 먼저 진맥한다. 왼손 진맥을 마치고서는 다시 큰 절을 하고 오른쪽에 서서 오른손을 마저 진맥을 하고 나서 임금 앞에 엎드려서 맥상(脈象)을 아뢴다.

예를 들면 “성상의 맥후는 부(浮)하며 삭(數)하니 상한병(傷寒病)이신 듯합니다. 탕제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한다. 만약 임금이 윤허하면 의관들과 상의해서 탕제를 올렸다.

간혹 임금이 직접 탕제를 정하기도 하고, 약재의 가감(加減)을 결정했다. 특히 영조는 자신의 처방에 관심이 많았다. 심지어 약재의 용량까지 정해 주기도 했다. 의관의 입장에서는 전문가가 아닌 임금이 처방을 하는 것이 못마땅 할 수 있겠으나 임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 그러나 그 책임은 의관에 있었다.

탕제를 올릴 때는 다양한 실무를 담당하는 직책인 장무관(掌務官)이 소반을 받드는데, 소반에는 표주박, 밀조(蜜棗) 두 개, 흰 모시 수건을 갖췄다. 이때 별지에 탕명(湯名)을 적어서 약을 담은 단지 그릇에 붙여 놓는다. 동시에 내의 의관이 화로를 받든다.

이렇게 준비가 되면 세 명의 제조와 가장 직책이 높은 위치의 의관이 함께 들어가서 “의관들이 논의하여 탕제를 전탕하여 왔습니다.”라고 고한다.

그리고는 수의(首醫)가 은표(銀瓢)가 들어 있는 상자의 자물쇠를 연다. 상자의 문이 열리면 도제도가 뒤에서 큰 소리로 “지금 자물쇠를 열어서 은표에 탕제를 붓겠습니다.”라고 고한다.

은표(銀瓢)는 은으로 만든 그릇이다. 과거에는 비상(砒霜)으로 인한 독살이 많았는데, 비상은 비소(As)와 황(S)의 화합물이다. 그런데 은(銀)이 황을 만나면 표면이 검게 변하기 때문에 은그릇에 탕약을 넣으면 비상이 포함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일상에서도 황이 포함된 달걀노른자 음식을 은 숟가락으로 먹으면 색이 검어지는 것이다.

과거 사약(賜藥)에도 비상과 함께 생부자, 생초오 등이 포함되었다. 생부자나 생초오와 같은 미나리아제비과의 뿌리에는 아코니틴이라는 독성분이 있어서 중추신경을 마비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비상이 아니더라도 생부자, 생초오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은(銀)은 황(S) 성분에만 반응하기 때문에 탕에 포함된 독성을 검출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방법이다.

탕약에 독을 섞는 것은 내의원의 의관과 내탁하여 독살하는 소급수(小急手)에 해당한다. 역모에는 삼수(三手)가 있다고 했다. 삼수(三手)란, 첫째가 대급수(大急手)로 자객을 궁중에 침투시켜 임금을 시해하는 방법이고, 둘째는 소급수(小急手)로 궁녀와 내통하여 음식에 독약을 타거나 약으로 독살하는 방법이고, 셋째는 평지수(平地手)로 임금의 전교를 위조하여 폐출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있는 것을 보면 약으로 독살하는 것도 없던 일이 아니었다.

만약 탕약을 넣은 후 은그릇의 색이 정상이면 비상독이 없다는 증거다. 그 다음에 다시 도제조가 탕약의 맛을 본다. 기미(氣味)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임금을 곁에서 모시는 내시에게 탕약을 전하여 올린다. 탕약을 따뜻하게 복용해야 할 때는 의관이 들고 온 화로로 잠시 약을 덥혀서 올린다.

다음으로 침치료다. 임금에게 침을 놓고자 할 때는 침의(鍼醫)들이 의논하여 먼저 혈자리를 정한다. 그 다음 누각(漏閣, 물시계)의 시간을 알리는 업무를 담당하는 금루관(禁漏官)과 침놓을 시간을 정한다.

혈자리와 시간이 결정되면 세 제조가 의관을 인솔하여 궁궐에 이르러 혈단자(穴單子)를 먼저 문서로 들인다. 보통 혈단자는 하루 전에 들여서 다음날 이른 아침에 시침을 할 수 있도록 정해야 한다. 시침 일시가 정해졌더라도 날이 비바람이 불거나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치는 날에는 시침하지 않고 연기하기도 한다. 간혹 임금의 기분에 따라 취소되기도 한다.

침치료 계획이 확정되면 의관 한 사람이 침구용품이 올려져 있는 소반을 받들고 세 제조와 수의(首醫), 침의가 따라 들어간다. 침을 놓을 때에는 수의가 혈단자를 받들어 외쳐 고하기를 “아무 혈에 침을 놓습니다.”라고 외친 후에 시침을 한다. 침을 놓을 때는 반드시 미리 고했던 혈단자에 따라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침으로 인한 독살이 의심되는 사건도 있었다. 인조의 장남이었던 소현세자는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8년 만에 돌아온다. 이후 소현세자는 두 달 만에 학질로 죽는데, 이때 병사가 아닌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주치의는 침의 이형익이었기 때문에 침으로 인한 독살설이 떠돌았다.

<인조실록(23년 7월 27일)>에는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 시체의 얼굴을 싸매는 헝겊)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형익은 인조의 총애를 받아서 죄를 면했다. 인조는 당시 침의 이형익에게 불에 달군 침인 번침(燔鍼)을 주로 맞았는데, 살 타는 소리가 문밖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주위에서는 이형익의 침술을 ‘요망한 의술로 오히려 원기를 상하게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침은 독의 여부를 떠나서 그 자체로 시해용 무기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침을 놓을 때는 어느 혈자리에 시침을 할지를 명확하게 밝힌 후에 침을 놓아야 했다. 그 자리에서 변경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간혹 임금이 시침할 침의를 직접 정해 주기도 했다. 당연히 실력 있는 침의로 정하고자 했겠지만. 우선적으로 충성심이 높은 믿을 만한 어의어야 했을 것이다.

침을 놓는 혈자리 중 어깨의 견정혈은 기흉을 유발할 수 있고, 우측 장문혈과 일월혈은 바로 간을 찌를 수 있으며, 좌측 유근혈은 바로 심장을 찌를 수 있다. 뒤통수 후발제의 풍부혈은 숨골(연수)을 찌를 수 있고, 아문혈은 일시적으로 벙어리를 만들 수 있다. 침에 독극물을 묻히지 않더라도 혈자리에 따라서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이다.

뜸을 뜰 때에도 우두머리 의관이 미리 단자를 올린 획지(劃紙)를 받들어 외쳐 고하기를 ‘아무 혈에 몇 장(壯)입니다.’라고 한다. 예를 들면 “족삼리에 10장입니다.”라고 고한 후에 뜸을 뜬다.

만약 왕비가 침구 치료를 받을 때는 남자 의관이 아닌 행수의녀(行首醫女)가 거행한다. 아무리 의관이라도 남자로서 왕비의 맨살을 촉진해서 혈자리를 잡아 침을 놓은 것은 불가했다. 심지어 왕비를 진맥할 때 명주실을 손목에 묶어서 대나무발 밖에서 진맥을 했다는 유언비어도 있을 정도다.

만약 명주실 진맥법이 실재했다면 어떻게든지 병세를 알아내라고 하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서 생겨난 기만하는 의료행위였을 수 있다. 참고로 명주실 진맥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진맥법이다.

이렇듯 내의원에서 왕을 치료하는 행위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의관 입장에서는 치료에 실패해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한다면 자칫 역적으로 몰릴 수 있었다. 반면에 왕 입장에서는 약과 침은 아무도 모르게 시해를 당할 수도 있는 잘 포장된 도구였기에 두려움이 있었다. 약(藥)과 독(毒)은 곁에서 보기에 구별이 안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 제목의 〇〇은 ‘은표(銀瓢)’입니다. 은표(銀瓢) = 은그릇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내의원식례(內醫院式例)>入侍. 〇入診. 三提調率醫官入侍. 次對同入, 則藥房在前, 經筵同入, 則經筵官在前. 都提調問候後請診, 醫官以次入診. 而自上交椅坐, 則起入左邊, 曲拜診左手訖, 又曲拜診右手亦如左, 退伏奏脈候. 臥內, 則曲拜之節, 不得如例, 隨便爲之. 啓辭問安, 則醫官座目書入. (임금에게 청하여 진료하기. 〇입진. 세 제조가 의관을 인솔하여 입시한다. 차대에 같이 입시하면 약방이 먼저이고, 경연에 같이 입시하면 경연관이 먼저이다. 도제조가 문후를 드린 뒤 진맥을 청하면 의관이 차례대로 입진한다. 임금이 교의에 앉아 계시면 일어나 좌측에 서서 곡배하고서 왼손을 진맥하고 마치면 다시 곡배하고서 오른손을 진맥하기를 왼손처럼 하고, 물러나 엎드려 맥상을 아뢴다. 대내에 누워계시면 곡배의 절차는 규례대로 할 수 없으므로 편의대로 한다. 계사문안할 때에는 참여한 의관명부를 문서로 들인다.)
〇持湯劑. 掌務官奉盤, 下番醫官奉爐. 三提調及首醫隨入, 至殿階, 首醫奉盤升殿, 鑰匙奉監. 都提調後唱告, 開鑰, 注銀瓢, 以餘湛注瓢. 蓋都提調嘗藥後, 奉傳挾侍以進. (탕제를 받듦. 장무관은 소반을 받들고, 하번의관은 화로를 받든다. 세 제조 및 수의가 따라 들어가 전의 계단에 이르면 수의가 소반을 받든 채 전에 올라 열쇠를 봉감한다. 도제조가 뒤에서 외쳐 고하기를 ‘자물쇠를 열어 은표에 붓습니다.’라고 하고, 남아 가라앉은 것까지 표주박에 붓는다. 대개 도제조가 약을 맛본 뒤에 받들어 협시에게 전하여 올린다.)
〇受鍼灸. 鍼醫議定穴名. 禁漏官奏時刻, 則三提調率醫官, 詣闕, 穴單子, 先爲書入. 醫官一員, 奉鍼灸盤, 三提調及首醫鍼醫隨入. 而受鍼時, 則首醫奉穴單子, 唱告, 某穴受鍼, 受灸時, 則首醫奉劃紙, 唱告, 某穴幾壯, 鍼灸畢後, 生脈散煎入. 內殿受鍼灸時, 行首醫女擧行, 而三提調率醫官, 詣闕, 待候. 以上入侍時, 閣臣同參事, 筵稟定式. (침구 치료를 받음. 침의가 의논하여 혈명을 정한다. 금루관이 시각을 아뢰면, 세 제조가 의관을 인솔하여 궁궐에 이르러 혈단자를 먼저 문서로 들인다. 의관 한 사람이 침구반을 받들고 세 제조 및 수의, 내침의가 따라 들어간다. 침을 놓을 때에는 수의가 혈단자를 받들어 외쳐 고하기를 ‘아무 혈에 침을 놓습니다.’라고 하며, 뜸을 뜰 때에는 수의가 획지를 받들어 외쳐 고하기를 ‘아무 혈에 몇 장입니다.’라고 한다.
침구를 마치고 나서 생맥산을 달여서 들인다. 왕비가 침구 치료를 받을 때에는 행수 의녀가 거행하는데, 세 제조가 의관을 인솔하여 궁궐에 이르러 명령을 기다린다.
이상의 입시 때 각신이 함께 참여하도록 연석에서 아뢰어 정식으로 삼았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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