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일은 반드시 하고 옳지 않으면 고친다" 老스승의 '거인 행보'

      2023.09.15 04:00   수정 : 2023.09.16 11:31기사원문

국제백신연구소(IVI) 한국후원회에 출근하는 날이면 먼저 설랑(雪浪) 조완규 박사님께 인사를 드린다. IVI 상임고문인 선생님은 96세인 지금도 매일 출근한다. 박사님은 필자에게 학문적으로 스승이고 인간적으로 롤모델인 멘토이다.

함께 자리를 하며 근황을 묻게 되면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스마트폰 앱에 기록된 근간의 보행숫자를 보여준다. 거의 매일 8000보에서 1만보 정도를 이미 아침에 걷고나서 출근한 기록이다.
새벽 4시면 기상해 2시간 정도 컴퓨터로 인터넷뉴스와 메일을 확인하고 답을 하면서 일과를 시작한다. 이어서 가까운 서리풀공원에 올라 언덕에 설치된 운동기구 너댓가지를 한번씩 활용하고 귀가하면 보통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간단히 요기하고 출근하면 거의 매일 각종 회의와 손님 면담 등의 일정이 서너 가지 이상 예약돼 있다. 중식 후 오후 3시께 퇴근해 다시 컴퓨터로 원고 작업을 마무리하고 저녁식사 후 9시에 취침하는 규칙적인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선생님에게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결코 일을 제약할 이유가 전혀 되지 못한다. 아흔다섯이 넘어서서 장수인의 경지에 들어서서도 일상생활의 일정에 전혀 변함이 없다.

선생님에게 생활습관에 규칙적인 운동이 자리 잡게 된 데는 엉뚱한 사건이 있었다. 군사정권 시절 대학교수들도 예외없이 체력단련 훈련을 받아야 했다. 당시 서울대 학장이었던 선생님은 앞장서서 뛰어야 했는데 운동장 한 바퀴도 제대로 돌지 못하고 힘들어서 뒤쳐지기 일쑤였다. 이에 대오각성하고 운동을 해야겠다고 각오하고, 성북동 자택에서 동숭동 캠퍼스까지 출근에 걷기를 시작했고 이후 달리기를 하여 내내 평생습관으로 삼았다. 그래서 지금도 서리풀공원 언덕을 오르고 내리는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있다. 항상 천천히 꾸준히 걷는 선생님은 놀랍게도 무릎 관절이 젊은이들 못지않게 건강하다. 옆에서 지켜보는 필자는 선생님의 바쁜 일정 그리고 쉼없이 움직이면서도 지친 기색이 전혀 없는 모습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은 서울대 문리대 생물학부 1회 졸업생으로 미국 펜실바니아대에서 연수 후 귀국해 록펠러재단의 후원금 1만5000달러로 발생학 중심의 생명과학실험실을 개설했다. 학장 재임시에는 정부를 설득해 IBRD 차관을 도입해 문리대 실험실을 재건해 발전의 토대를 이뤘다. 행정적으로는 교수연구비 관리체계를 정비하고 교수 공채 제도를 도입하는 등 당시로서는 엄두도 못낼 혁신적인 대학 개선방안을 추진해 오늘날 서울대의 위상을 갖추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조 박사님의 특별한 기록은 전설이 되었다. 그것은 서울대 교수직을 두 번 사임하고 세 번 발령받은 사실이다. 당시 서울대 총장과 부총장 직은 별정직이었기 때문에 임용되면 교수직을 사임해야만 했다. 그래서 부총장이 되면서 사임하고 임기 끝나고 다시 임용됐고 총장이 되면서 다시 사임하고 임기 끝나고 다시 교수 발령을 받았다. 한번도 어려운 서울대 교수직을 세 번이나 발령받은 에피소드는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생님은 서울대 문리대학장, 부총장, 총장을 역임 후 교육부 장관,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 등을 역임하고 국가과학기술유공자와 대한민국학술원회원으로 추대됐다.

선생님의 활동 무대는 실로 한계가 없었다. 포항공대, 광주과기원 설립을 주도해 이들 신설 기관들이 빠른 시일 내에 학계의 중점기관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조 박사님은 파격적인 인재 중용과 안정된 거주 환경, 그리고 자녀교육 보장이라는 요구를 관철시켜 우수한 인재들의 활동 무대를 든든하게 받쳐 주었다. 학계 활동 이외에도 각종 학술단체 및 사회단체의 회장을 두루 역임했다. 아흔 살이 넘어서도 '한국벤처한림원'을 창립해 중소기업을 돕기 위한 방안을 개척했으며, 우리나라 과학계를 국제적 선도그룹으로 진흥하고 노벨상 수상을 추진하기 위한 본격적인 노력으로 '과학키움'이라는 단체를 설립하는 등 국가 발전과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기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자랑스러운 일은 국제백신연구소의 유치다. UNDP가 저개발국가의 전염병 예방을 위한 저비용 백신 공급을 위한 국제기구 설치를 고민하고 있을 때 조 박사님은 후배인 박상대 교수와 함께 심혈을 기울여 연구소를 우리나라에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UN기구 중에서 본부가 대한민국에 소재한 유일한 기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정부의 지원 약속 이행이 어려워지고 UN기구 중 WHO와의 관계도 난항에 빠졌을 때 조 박사님은 탁월한 설득력과 투철한 사명의식으로 모든 난관을 해결해냈다. 그 결과 코로나 사태가 터졌을 때 IVI가 국제적으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고 우리나라의 바이오산업 위상이 도약하게 된 계기를 이뤘다.

선생님의 이러한 행보의 뒤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하고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바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고쳐야겠다는 사명감과 해야 할 것은 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비록 수많은 보직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맡게 되었더라도 부득이 일단 맡게 되면 소신을 가지고 과감하게 일들을 처리했다. 특히 대학의 구습과 제도적 모순을 해결하고 바람직한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우선 총장이 되어서는 그 때까지 관료적이었던 대학의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행사 때마다 총장 이하 보직자들이 차례로 줄지어 나가는 구습을 없애 버렸고, 교수들이 자유롭고 편하게 활동하고 격의 없게 대하도록 배려했다.

교육부 장관이 되어서는 당시 유명한 사립대학교 재단의 횡포에 대해 재단을 과감하게 해체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당시 대통령도 어쩌지 못하고 있던 차에 당신의 사표를 들고 다니면서 쾌도난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결국 대학을 정상화하고 지역사회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선생님은 자신이 이룬 이런 엄청난 개혁들을 회상하면서 해야 할 일 했다고 담담하게 표현했다.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추진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고쳐서 세상을 바르게 이끌려고 평생을 노력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조완규 박사님의 행로에서 위대한 거인의 행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자"의 신념으로 망설이지 않고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어 온 지도자의 삶에서 살아있는 전설의 거룩한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박상철 전남대 의대 연구석좌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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