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와 숙제는 수양산에서 OOOO를 캐 먹다 죽었다
2023.10.14 06:00
수정 : 2023.10.14 06:00기사원문
옛날 은(殷)나라 탕왕(湯王) 때 제후국 중에는 고죽국(孤竹國)이 있었다. 고죽국을 다스리는 군주에게는 3형제가 있었는데, 맏형인 백이(伯夷)와 둘째 아빙(亞凭), 그리고 막내 동생인 숙제(叔齊)였다.
숙제는 아버지가 죽고 나자 맏형에게 군주의 자리를 양보했다. “형님이 모름지기 장손이니 후사를 이으셔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형은 이미 왕위에 뜻이 없었고, 아버지의 유지에 마음이 상한 터라 거절했다. 백이는 “이미 아버지의 명이고 유언이다.”하고 말하고서는 궁을 떠나 버렸다. 사실 신하들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숙제 또한 왕위에 욕심이 없었다. 그래서 형인 백이를 찾아 궁을 떠났다. 결국 둘째인 아빙이 군주가 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왕위를 이을 왕자들이었지만 궁과 자국을 등진 떠돌이 신세가 되어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당시 인접국으로 주나라가 있었다. 그런데 주문왕(周文王) 서백창(西伯昌)이 노인을 잘 모신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의탁하고자 백의와 숙제는 주문왕을 알현하고자 했다.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에 도착했다. 그런데 궁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며칠 전 주문왕이 서거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장례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주문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아들 무왕(武王)은 아버지 장례를 치르지도 않고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무왕은 나무로 만든 위패를 실어 문왕으로 추존하고 동쪽에 있는 종속관계의 상(商)나라의 주(紂)왕을 칠 요량으로 말을 타고 출정 채비를 했다. 당시 주나라는 상나라에게 공을 바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는 반역과 다름없었다. 상나라는 은(殷)나라라고도 불렀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지내지 않고 창칼을 들다니 효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하로써 주국의 왕을 치는 것을 어진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무왕은 어이가 없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아버지인 문왕의 유지 때문이었던 것이다. 문왕은 죽기 전 아들에게 “내가 죽거든 상나라를 쳐서 멸망시켜라.”라고 유지를 남긴 것이다.
이를 몰랐던 백이와 숙제는 곁으로 보기에 반역이라 여긴 것이다. 무왕 옆의 신하들은 감히 왕에게 건방진 소리를 한다고 칼을 꺼내 백이와 숙제의 목을 치려고 했다.
그때 무왕의 공신인 강태공이 나셨다. “멈추거라. 이분들은 의로운 분들이시다.”라고 하면서 백이와 숙제를 피신시켰다. 무왕은 이러한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고 상나라를 쳐서 어지러움을 평정했다. 결국 천하는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삼게 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강태공 때문에 목숨을 건사했지만, 이 소식을 듣고서 한탄했다. 이들은 신하로서 군주에 대한 신의(信義)를 져버린 것을 개탄하고 부끄럽게 여겨 절개를 지키고자 “배신자 나라의 곡식은 먹지 않겠다.”라고 말하고서는 수양산의 작은 움막집으로 숨어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봄철이긴 했지만 수양산에는 먹을 것들이 없었다. 산에는 단지 생고사리들만 빼곡하게 나 있었다. 백이와 숙제는 어쩔 수 없이 고사리를 캐서 먹었다. 많이 뜯어서 훗날 먹으려고 말려 놓기도 했다.
봄철의 생고사리는 연해서 먹기에 부드러웠다. 끈적거리면서 맛도 좋았다. 백이와 숙제는 고사리뿐만 아니라 고비도 뜯어 먹었다. 고사리와 고비는 비슷하게 생겼다.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고사리인지 고비인지 구분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3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이상하게 고사리를 먹으면 먹을수록 다리에 힘이 빠졌다. 게다가 양기가 떨어지면서 양위(陽痿)가 생겼다. 양위는 남성의 발기불능을 말한다. 눈은 점차 침침해지고 머리카락이 줄었으며 배가 불러 복창(腹脹)이 생겼다. 그러나 얼굴만은 축나지 않았다.
궁에서 주나라 무왕이 신하에게 물었다. “그때 그 무엄한 자들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느냐?” 그러자 신하는 “수양산에 숨어 들어가 고사린지 고빈지를 뜯어 먹으면서 산다고 합니다.”
무왕은 “수양산의 고사리라. 배신자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하고서 산속으로 들어가서는 수양산의 고사리를 먹는다? 수양산에 난 풀도 주나라 것이 아니더냐?”하고 반문했다.
사람들은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의 고사리를 먹는다고 수군거렸다. “백이와 숙제는 이율배반적이다.”라는 말이 산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했다.
백이와 숙제는 억울한 마음에 고사리마저 끊어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전쟁과 복수로 얼룩진 세태를 원망하며 시 한 수를 지었다. 바로 채미가(采薇歌)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登彼西山兮 采其薇矣].
포악함으로 포악함을 바꾸면서도[以暴易暴兮],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구나.[不知其非矣].
신농(神農)과 우(虞), 하(夏)의 시대가 몰망하니[神農虞夏 忽然沒兮],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我安適歸矣]
아! 이제는 죽음 뿐이니[于嗟徂兮],
쇠잔한 우리의 운명이여[命之衰矣]!”
백이와 숙제는 고사리마저 끊고서 굶어 죽었다. 그래서 후세에서는 백이와 숙제를 청절지사(淸節之士)로 불렀다.
훗날 공자는 “백이와 숙제는 부정과 불의를 혐오하고 일을 미워했지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또 지난 잘못을 생각하지 않았고, 원망을 품은 일이 드물었다. 그들은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하랴?”라고 평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고사리 때문에 죽은 것일까 아니면 굶어 죽은 것일까. 그러나 백이와 숙제가 요절한 것이 어찌 고사리 때문이었겠는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흉년으로 인해 굶주린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죽음의 경계에 있을 때 고사리에 힘입어 살아나기도 했으니 또한 고사리에 세상을 구제하는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어찌 되었든지 백이와 숙제 고사로 인해 사람들은 고사리를 생으로 먹는 것을 꺼렸다. 게다가 의서에서조차 <수신기>에 기록된 ‘어떤 사냥꾼이 고사리 한 줄기를 꺾어 먹었는데 가슴 속이 좋지 못하더니 병이 났다. 후에 작은 뱀 같은 것을 토했고 이것을 처마에 걸어두자 점차 마르더니 고사리가 되었다. 마침내 이것은 고사리를 생으로 먹을 수 없음이 밝혀졌다.’라는 이야기 등이 덧붙여지면서 생고사리 섭취에 대한 두려움을 상기시켜왔다.
의서에서는 ‘고사리는 그 줄기가 여릴 때는 채취하여 잿물에 삶아 끈적이는 즙을 제거하고 햇볕에 말려 나물로 만들어 먹으면 안전하다.’하고 기록해 놓고 있다. 생고사리로는 먹지 말라는 것이다.
실제로 생고사리는 각기병을 유발한다. 생고사리에는 티아민(비타민B1) 분해효소가 있어서 생으로 오랫동안 많은 양을 먹으면 티아민 결핍증으로 각기병이 생긴다. 그래서 생고사리를 많이 먹으면 다리에 힘이 빠지고 활력이 떨어진다. 특히 옛말에 어린아이들의 고사리를 많이 먹으면 다리가 약해져 걸을 수 없다고 했다. 항간에 고사리를 먹으면 정력이 약해진다는 말도 괜한 말이 아니다. 다만, 역시 고사리는 생으로 먹으면 안되는 것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생고사리는 요절하게 하지만 익힌 고사리는 연명하게 한다.
* 제목의 ○○○○는 ‘생고사리’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사기열전(史記列傳)>伯夷列傳. 전략. 孔子曰 “伯夷, 叔齊, 不念舊惡, 怨是用希.” “求仁得仁, 又何怨乎?” 余悲伯夷之意, 睹軼詩可異焉. 其傳曰 伯夷, 叔齊, 孤竹君之二子也. 父欲立叔齊, 及父卒, 叔齊讓伯夷. 伯夷曰 “父命也.” 遂逃去. 叔齊亦不肯立而逃之. 國人立其中子. 於是伯夷, 叔齊聞西伯昌善養老, 盍往歸焉. 及至, 西伯卒, 武王載木主, 號為文王, 東伐紂. 伯夷, 叔齊叩馬而諫曰 “父死不葬,爰及干戈,可謂孝乎? 以臣弒君, 可謂仁乎?” 左右欲兵之. 太公曰 “此義人也.” 扶而去之. 武王已平殷亂, 天下宗周, 而伯夷, 叔齊恥之, 義不食周粟, 隱於首陽山, 采薇而食之. 及餓且死, 作歌. 其辭曰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 虞, 夏忽焉沒兮, 我安適歸矣? 于嗟徂兮, 命之衰矣!” 遂餓死於首陽山. 由此觀之, 怨邪非邪? (백이열전. 전략. 공자가 말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지난날의 과오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사람을 원망하는 일이 적었다.” “어짊을 구하면 어짊을 얻어지니 또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나는 백이의 뜻을 슬퍼하며, 그의 시, 채미가를 보면 정말로 이상했다. 그들의 전기는 다음과 같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군의 두 아들이다. 아버지가 숙제를 영주로 세우려 하였는데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백이에게 양보했다. 백이가 말하기를 “아버지의 명이다.”하고는 곧 달아나 버렸다. 숙제 또한 자리에 오르려하지 않고 달아났다. 나라 사람들이 그 둘째 아들을 영주로 세웠다. 이 무렵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서백창이 노인을 잘 모신다는 말을 듣고, ‘어찌 가서 의탁하지 않는가’ 하였다. 주나라에 이르자 서백은 죽고 아들 무왕이 나무로 만든 위패를 실어 문왕으로 추존하고 동쪽으로 은나라의 주왕을 치려고 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지내지 않고 창칼을 들다니 효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것을 어진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왕의 좌우 신하들이 죽이려 하였다. 강태공이 말하였다. “이 사람들은 의인이니라.”하고 모시고 갔다. 무왕이 이미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니 천하는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삼았으나 백이와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절개를 지켜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어 먹었다. 굶어서 죽기에 앞서 노래를 지었는데 그 노랫말은 이렇다. “저 서산에 오름이여 고사리를 캐노라. 폭력으로서 폭력을 바꿈이여,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도다. 신농, 우. 하가 이미 사라졌으니 우리는 어디로 돌아갈까나? 아, 우리는 죽음의 길로 간다. 우리의 목숨이 쇠하였도다!” 마침내 수양산에서 굶어죽었다. 이렇게 볼 때 원망했는가, 그렇지 않은가?)
<본초강목>蕨. ○ 藏器曰多食消陽氣, 故令人睡, 弱人脚. 四皓食芝而壽, 夷齊食蕨而夭, 固非良物. 干寶搜神記云, 郗鑑鎭丹徒, 二月出獵. 有甲士折蕨一枝, 食之, 覺心中淡淡成疾. 後吐一小蛇, 懸屋前, 漸乾成蕨. 遂明此物不可生食也. (고사리. 진장기는 ‘고사리를 많이 먹으면 양기를 소모시키므로 잠이 오게 하거나 다리가 약해지게 한다. 상산사호는 영지를 먹고 오래 살았고, 백이와 숙제는 고사리를 먹고 요절하였으니, 참으로 좋은 것은 아니다. 간보의 수신기에서는 희감이 단도를 진압하고 2월에 사냥을 나갔다. 어떤 갑사가 고사리 한 줄기를 꺾어 먹었는데 가슴 속이 좋지 못하더니 병이 났다. 후에 작은 뱀 하나를 토해냈고 이것을 처마에 걸어두자 점차 마르더니 고사리가 되었다. 마침내 이것은 생으로 먹을 수 없음이 밝혀졌다고 하였다’라고 했다.)
○ 時珍曰蕨之無益, 爲其性冷而滑, 能利水道, 泄陽氣, 降而不升, 耗人眞元也. 四皓采芝而心逸, 夷齊采蕨而心憂, 其壽其夭, 於蕨何與焉? 陳公之言, 可謂迂哉. 然飢人瀕死, 賴蕨延活, 又不無濟世之功. (이시진은 ‘고사리가 무익한 것은 그 성질이 차면서 매끄러워 소변을 잘 빠져 나가게 하거나 양기를 빠져나가게 하거나, 기가 내려가서 올라오지 못하게 하거나, 사람의 진원을 소모시키기 때문이다. 상산사호는 영지를 채취해 먹을 때 마음이 편안하였고, 백이와 숙제는 고사리를 채취해 먹을 때 마음속에 근심이 가득하였으니, 사호는 장수하고 백이숙제는 요절한 것이 어찌 고사리 때문이겠는가. 진장기의 말은 물정 모르고 한 소리라고 할 만하다. 그리하여 굶주린 사람들이 죽음의 경계에 있을 때 고사리에 힘입어 살아나니 또한 세상을 구제하는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 薇. 生水旁, 葉似萍, 蒸食利人. 三秦記云, 夷齊食之三年, 顔多不異. 武王誡之, 不食而死. (고비. 물가에서 나고 잎은 개구리밥과 유사한데, 쪄 먹으면 사람에게 이롭다. 삼진기에서는 ‘백이와 숙제가 이것을 3년 동안 먹었는데, 얼굴이 전혀 축나지 않았다. 무왕이 의아해 여기자 급기야 이마저 끓고 죽었다고 하였다.
<향약집성방>蕨. 食療云 寒. 補五臟不足, 氣壅經絡, 筋骨間毒氣, 令人脚弱, 不能行. 消陽事, 令眼暗, 鼻中塞, 髮落, 不可食. 又冷氣人食之多腹脹. 詩云 陟彼南山, 言釆其蕨. 又曰 言采其薇. 是蕨薇俱可食. 伯夷叔齊採薇而食, 恐蕨非薇也. 蕨處處山中多有之. 今永康道江居民多以醋淹而食之. (고사리. 식료본초에서 이르길, ‘고사리는 약성이 차갑다. 오장의 부족함을 보한다. 기가 경락을 막고 근골 사이 독기로 사람의 종아리가 약해져서 걷지 못하게 한다. 성관계가 적어지고 눈이 어두워지며 콧 속이 막히고 머리털이 떨어지므로 먹으면 안 된다. 또 기가 차가운 사람이 먹으면 배가 많이 차오른다. 시경에서 이르기를 저 남산에 올라서 고사리를 채취한다고 말했고 또 고비를 채취한다고 하였다. 고사리와 고비는 다 먹을 수 있다. 백이와 숙제가 고비를 채취해서 먹었다고 하는데, 아마 고사리지 고비가 아닐 것이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