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이스라엘과 정면 충돌 원치 않아, "가자지구 구할 수도 포기할 수도"
2023.10.24 06:00
수정 : 2023.10.24 06:0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이스라엘과 원수지간인 이란이 이달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충돌에서 경고 발언을 쏟아내는 가운데 이스라엘과 이란의 직접 충돌 가능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관계자들은 양측 모두 충돌을 원치 않지만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같은 무장조직이 선을 넘는 경우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며 무장조직의 도발에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통제 불능" 파국 피해야
AFP통신 등 외신들에 따르면 이란의 호세인 아미르압돌라히안 외무장관은 22일(현지시간) 테헤란에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을 언급했다.
아미르압돌라히안은 "미국과 그 대리인(이스라엘)에게 경고한다"며 "만약 이들이 가자지구에서 반인륜 범죄와 대량학살을 즉각 멈추지 않는다면 그 어느 순간에 어떤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으며, 중동은 통제 불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날 하마스 역시 성명을 내고 조직을 지도하는 이스마엘 하니예가 이란의 아미르압돌라히안과 전화 통화를 했다고 밝혔다. 하마스는 양측이 “가자지구에 대한 시오니스트(유대민족주의)의 공격과 관련된 최근 사건과 적들이 가자지구에서 저지른 잔혹한 범죄를 막을 모든 수단에 대해 논의했다”고 전했다.
미국은 이란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중동의 미군을 도발하여 충돌을 키울 수 있다고 본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22일 ABC방송에 출연해 "잠재적인 갈등 격화 가능성에 우려한다"면서 "사실상 우리는 역내 미군 및 미국인에 대한 공격의 심각한 격화 가능성을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날 오스틴은 중동 갈등 고조에 대비해 추가 병력 배치를 준비한다고 알렸다. 오스틴은 "병력 추가 배치는 이번 갈등을 확대하고자 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또 다른 메시지"라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권리를 지니고 있으며,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군 중부사령부는 이미 18일 발표에서 이라크의 미군 기지가 무인기(드론) 공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사건 직후 현지 이슬람 무장 조직들은 앞 다퉈 자신들이 미군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이란 정면충돌 원치 않아
NDTV 등 인도 매체들은 22일 영국 통신사 등을 인용해 이란 역시 내부적으로 복잡한 상황 때문에 미국이나 이스라엘과 전면적인 충돌을 원치 않는다고 전했다.
이란 국회의 바히드 잘랄자데 국가안보위원회 위원장은 18일 "우리는 친구인 하마스와 이슬라믹지하드, 헤즈볼라와 연락하고 있다"며 "그들은 이란의 군사작전을 기대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3명의 이란 안보 관계자는 현재 정부 최상층에서 이번 사태의 대응방안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관계자들에 의하면 이란 정부는 레바논 헤즈볼라의 제한적인 이스라엘의 군사 표적 공격 및 중동의 미군을 노리는 이란 연계 조직들의 저강도 공격을 허용하고 지지할 계획이다. 대신 이란 정부는 이란이 직접 개입할 수밖에 없는 전면적인 분쟁은 차단하기로 했다.
관계자들은 이란이 이번 사태로 진퇴양난에 빠졌다고 입을 모았다. 이슬람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은 수십 년 전부터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반군 등 시아파 무장조직을 지원하며 중동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마스는 비록 수니파였지만 이란은 하마스를 중동 전략의 핵심 축으로 보고 이들을 지원했다.
관계자들은 만약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붕괴된다면 30년 넘게 이어진 이란의 중동 전략에 큰 구멍이 생긴다고 평가했다. 이어 만약 이란이 이번 사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현지 무장조직들이 이란을 약하다고 볼 것이며 중동 내 이란의 입지가 좁아진다고 추정했다.
이란은 나설 수 없는 사정이 있다. 현재 이란에서는 계속되는 미국의 제재에 따른 경제 악화로 민심이 좋지 않은데다 지난해 히잡 단속으로 시작된 반정부 시위가 다시 불붙고 있다.
22일 이란 국영방송에 따르면 지난 1일 테헤란에서 히잡을 쓰지 않고 지하철에 탔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폭행당한 10대 소녀가 결국 뇌사상태에 빠졌다. 게다가 미국은 하마스의 공격 이후 2개의 항공모함 전단을 이스라엘 인근에 보내 무력시위에 나섰다.
익명의 이란 고위 외교관은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최우선 과제는 국가의 생존"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란 정부는 이번 사태 직후 강경한 어조로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직접적인 군사 개입은 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 이스라엘 정보 당국에서 일했으며
현재 미 아이젠하워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아비 멜라메드는 "이란은 지금 가자지구를 구하기 위해 헤즈볼라를 보낼 지, 혹은 가자지구를 포기할 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위험을 계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헤즈볼라의 도발 강도 주목해야
헤즈볼라와 연계된 2명의 관계자는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주변에서 '작은 전쟁'이라고 불리는 저강도 공격을 산발적으로 일으켜 이스라엘을 혼란스럽게 만들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이어 헤즈볼라가 새로운 전선을 형성할 계획은 없다고 전했다.
3명의 이스라엘 및 서방 안보 관계자는 이스라엘 역시 이란 군대가 직접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않으면 이란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관계자들은 헤즈볼라나 시리아에서 활동하는 다른 이란 연계 조직이 이스라엘에 심각한 인명 피해를 초래한다면 상황이 바뀔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 인디애나주 노트르담 대학의 애셰 카우프만 역사 교수는 23일 미 경제지 포천에 낸 기고문을 통해 헤즈볼라가 이란과 레바논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번 사태의 규모가 결정된다고 분석했다.
헤즈볼라는 하마스보다 2년 먼저인 1985년에 결성된 조직이다. 아랍어로 ‘신의 당’이라는 뜻을 지닌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이 1983년에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을 소탕하려고 레바논 남부를 공격하자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1979년 이란 혁명을 주도했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이란 최고지도자는 헤즈볼라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헤즈볼라는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에서 활동하며 각종 테러를 벌였고 1992년에는 레바논 정계에도 진출했다. 지난해 5월 총선에서는 의회 128석 가운데 61석을 확보했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에서 2020년 베이루트 항구 대폭발 사고 이후 정부와 군대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2021년 기준 약 10만명의 병력을 보유, 레바논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조직으로 불리고 있다.
이란의 아미르압돌라히안 장관은 16일 이란 국영방송에 출연해 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의 말을 전했다.
나스랄라는 아미르압돌라히안에게 “오늘 선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내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이스라엘군과 싸워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 미 정치매체 악시오스는 미국과 이스라엘 관계자들을 인용해 미 정부가 헤즈볼라의 전면 개입 시 미군 병력을 투입하는 시나리오를 검토중이라고 보도했다. 이후 존 커비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미군을 지상 전투에 투입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