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호걸' 시라노의 귀환.. 우리 모두의 서글픈 사랑 이야기
2024.12.14 14:53
수정 : 2024.12.14 14:53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세상이 날 짓밟아도 달을 쫓아 나는 가리, 콧대를 높게 치켜들고"(시라노 대사 중)
5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시라노'가 한층 깊어진 감동을 선사하며 성공적인 귀환을 알렸다. 지난 2017년 초연과 2019년 재연에 이어 새로워진 무대 구성과 연출로 기존 관람객은 물론 새로운 팬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시라노'는 지난 6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프리뷰 공연을 시작한 이후 10일부터 본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뮤지컬 '시라노'는 프랑스시인이자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이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쓴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각색한 작품이다. 스페인과 전쟁 중이던 17세기 프랑스에서 용맹한 가스콘 부대를 이끌었던 콧대 높은 영웅 시라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연애편지 대필이라는 재미있는 설정을 바탕으로 '낭만 호걸'이었던 시라노의 명예로운 삶과 고귀한 사랑을 그린다.
뮤지컬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의 드라마틱한 음악, 작사가인 고(故) 레슬리 브리커스가 쓴 사랑의 언어와 위트 넘치는 대사는 낭만적인 무드를 증폭시키고, 8인조 오케스트라가 빚어내는 풍성한 사운드가 귀를 사로잡는다. 프랭크 와일드혼이 새로 작곡한 '연극을 시작해', '말을 할 수 있다면', '달에서 떨어진 나' 등 3곡의 넘버는 서사의 힘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시라노'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공연의 각색을 맡은 김수빈 번역가는 "배경이 17세기의 프랑스일 뿐, 지금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생생한 이야기일 수 있도록 구성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작품의 줄거리는 익히 알려져 있지만 새로운 연출과 무대 구성, 배우들의 활약으로 오랜 이야기는 또다시 힘을 얻었다. 노래와 대사를 유려하게 넘나드는 목소리와 제스처, 생생한 표정들은 짙은 호소력을 가진다. 슬프지만 웃기고, 심각하면서도 가벼운 상황 전개는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요즘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일깨워준다.
이번 시즌 시라노 역을 맡은 조형균·최재림·고은성은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이 요구되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힘찬 에너지를 전하기도, 애절한 노래로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하는 등 관객들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이다.
코믹한 말과 행동으로 악의 없는 웃음을 주는 시라노, 전투를 앞두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크리스티앙에게는 용기를 심어주는 인생 선배 시라노, 전하지 못한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고독한 시라노 등 인물이 지닌 다면적 매력을 강하고 섬세하게 그린다.
록산 역의 나하나·김수연·이지수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뛰어난 가창력은 물론 검술 액션도 매끈하게 소화하며, 시대를 앞서가는 주체적인 여성의 상을 그려냈다.
가스콘 부대의 신입 병사이자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크리스티앙 역은 임준혁과 차윤해가 맡았다. 두 사람 모두 정확한 딕션과 깔끔한 가창력, 자연스럽고 천연덕스러운 연기로 삼각관계에서 비롯된 순수한 낭만성을 드러낸다. 이와 더불어 극에 재미를 더해주는 이율(드기슈 역), 최호중(르브레 역), 원종환(라그노 역) 등 베테랑 배우들의 호연도 돋보인다.
이번 시즌 달라진 무대 구성은 신선한 현장감으로 시선을 붙든다. 찢어진 종이가 겹겹이 쌓여 마치 오래된 책을 보는 듯한 네모 프레임이 등장하고, 그 안으로 다채로운 영상이 펼쳐진다. 작품 속 배경이 되는 주요 장소를 생생하게 구현해 몰입감을 높였다.
계절을 나타내는 커다란 나무 등 대도구와 무대 중앙 회전 장치를 적극 활용한 점도 돋보인다. 라그노의 빵집, 가스콘의 훈련장, 록산의 집, 수녀원, 전쟁터 등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장면들은 팝업 형태 그림책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효과를 준다.
탄탄한 실력을 갖춘 앙상블과의 시너지도 눈여겨볼 만하다. 정도영 안무가와 홍현표 무술감독은 합심해 만든 화려한 액션 군무가 핵심 장면에 녹아들었다. 하이라이트 넘버인 '가스콘'에서의 전투 장면은 극도의 긴장감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며 진한 여운을 남긴다. 공연은 오는 2025년 2월 23일까지 이어진다.
en1302@fnnews.com 장인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