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18일 정부는 고위공직자 주식 백지신탁제도 도입을 주요 골자로 하는 공직자윤리법을 입법예고했다.
사실 ‘백지신탁’이라는 말은 대부분의 국민에게는 낯선 용어다. 백지신탁제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 하나가 있다.
‘새 차를 타고 가다 사고로 다쳤는데 알고 보니 브레이크에 결함이 있었다. 브레이크 제조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하려고 한다. 당신이라면 그 회사의 주식을 상당량 보유한 변호사를 선임할 것인가. 변호사의 부인이 그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거나 변호사가 그 회사의 임원이라면…. 아마도 당신은 그 변호사가 당신을 성실하게 변호해 줄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이는 국민의 대리인인 공직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공직자는 오로지 공익을 위해 성실히 그 직무에 전념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공직자가 특정 회사의 주식을 상당량 보유하고 있는 경우, 그 회사에 유리한 정책을 펴거나 경쟁업체에 불리한 정책을 펼 개연성이 있다. 또 직무상 정보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백지신탁이란 공직자가 신탁재산의 관리·운용·처분 권한의 일체를 수탁기관에 위임하고 이에 전혀 관여치 않는 것이다.
신탁방식에는 수탁기관에 재산을 맡기기만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번에 정부가 도입하려는 것처럼 수탁기관이 최초에 신탁받은 재산을 다른 재산으로 바꾸어 공직자로 하여금 자기 재산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도록 하는 제도도 있다.
즉 공직자가 특정회사의 주가를 올리기 위한 정책을 펼 유인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이를 ‘블라인드 트러스트(blind trust)’라고 한다. 이번에 정부가 도입하려고 하는 백지신탁제는 바로 미국의 ‘블라인드 트러스트’와 같은 제도다.
백지신탁 제도는 단순히 정보를 이용한 부정한 재산증식을 막고 공직자의 청렴을 담보하는 장치로서만 그 의미를 한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 제도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제도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정경분리의 새로운 원칙을 세운다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와 명예, 권력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란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했다. 정치와 행정은 그 가치를 배분하기 위해 갈등을 조정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한다. 이윤추구를 위한 효율을 따지는 기업의 논리와 달리 더디 가더라도 사회적 약자를 보듬고 가는 것이 정치의 논리다. 이러한 정치의 논리, 즉 공익을 추구하는 정신은 부를 추구하는 정신과 조화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기업 소유 지분을 가진 고위공직자의 경우 사실상 ‘정경일체’라고도 할 수 있다. 기업인의 경험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미국에도 기업경영인 출신 공직자는 많지만 이들은 공직 취임과 동시에 기업경영에서 물러나고 자신의 직위와 이해관계가 있는 재산은 매각 또는 백지신탁을 한다. 또 업무 이외에 다른 소득을 얻거나 기업의 임원을 겸할 수 없고 회사에 명의를 빌려주는 것도 법으로 금하고 있다.
미국 상원의원인 존 콜진은 골드만 삭스의 최고경영자(CEO)였지만 공직 취임과 동시에 주식을 백지신탁했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역시 텍사스 주지사에 당선됐을 당시 텍사스 레인저스 야구단 주식을 매각해 그 운영권을 포기했다. 반대로 클린턴 정부의 샌디 버거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석유기업 아모코의 주식을 매각하라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아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그간 입법예고, 공청회 등을 거치면서 이번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공직자의 윤리의식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크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1962년 10월 미국 의회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입법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뇌물 및 이해충돌에 관한 법’을 통과시켰다.
이제 정부도 이 법안을 국회에 제출할 것이다. 여야가 지난 총선에서 공약사항으로 제시한 만큼 국회에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 제도의 도입을 통해 공직자의 윤리의식이 확립되고 공직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