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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은의 마음의 감기를 치유하는 명화] <25> 레이턴 ‘클뤼티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8.02.28 16:45

수정 2014.11.07 12:03



■세상의 중심에 ‘나’를 세우라

부여에 갔다가 궁남지에 수련이 가득 피어있는 모습을 운 좋게도 본 적이 있다. 꽃 하나하나가 정세에 물들지 않은 선비처럼, 기품 있는 여인처럼 맑고 고고해 보였다. 탁한 물에서 이렇게 맑은 꽃을 피우다니 그 높은 덕망의 경지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꽃의 공덕이 꽃 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을 곧 발견해냈다. 꽃의 고결함을 지켜주기 위해서 뿌리와 줄기 그리고 잎들이 말없이 더러움을 감당하고 있었다.
물에서 양분을 뽑아 깨끗한 것만 걸러내어 꽃으로 공급해주느라 그것들은 어쩌면 찌꺼기만 먹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렇듯 다른 부분들을 모두 희생시키더라도 꽃만큼은 최고로 정결하고 향기로워야 할 만큼 식물에게 꽃은 최상의 가치이자 존재이유임에 틀림없다.

꽃에 얽힌 전설이나 신화를 보면 식물이 꽃을 피우기까지 얼마나 공을 들이며 기다리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국 왕립아카데미의 원장을 지냈던 레이턴이 꽃과 관련된 그리스신화를 소재로 그린 그림이 있다. 온 몸을 활짝 열어 하늘을 향하고 있는 여인이 그림의 중앙에 보이는데, 그녀가 바로 그림의 제목인 ‘클뤼티에’이다.

물의 요정인 클뤼티에는 태양신 아폴로를 짝사랑하여 늘 태양이 물 위로 떴다가 물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이렇게 고개를 뒤로 젖힌 자세로 꼼짝하지 않고 태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클뤼티에는 물의 요정인지라 그녀의 몸은 태양빛에 견디기 어려웠다. 특히 태양이 하늘에 떠있는 동안 물 밖으로 나와 있으면 수분이 모두 말라버려 생명이 위험할 정도였다.

클뤼티에의 유일한 소원은 아폴로가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에게 눈짓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그녀는 양 손은 벌리고 얼굴은 위로 향한 채 말라 죽고 말았다. 그녀의 몸은 수증기처럼 하늘로 퍼져 올라갔고, 죽은 자리에서는 해바라기가 피어났다고 한다. 언뜻 듣기에는 사랑을 얻지 못한 슬픈 짝사랑의 이야기로 들리지만, 짝사랑 정도에서 끝나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한 식물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자 고통과 외로움을 참고 견뎌냈으며, 장하게도 마침내 꽃으로 피워낸 기적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게 인내하며 피워낸 꽃이건만 꽃은 허무하게도 시들어버린다. 그런 이유로 꽃은 줄곧 인생무상을 의미해왔다.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해는 높이 떴다가도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바람은 그토록 약삭빠르게 불다가도 결국에는 불던 곳으로 돌아가며, 강물은 철철 넘쳐 바다로 흐를지라도 바다를 다 채우지는 못한다. 성서의 ‘전도서’에 나오는 글귀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파란만장한 삶을 펼쳐본다 한들 세상은 새로울 것이 없고 세대는 그저 반복될 뿐이라는 것이다. 꽃 역시 아무리 어렵게 봉오리를 터뜨렸어도 곧 사라질 운명이기에 그 노력이 다 소용없는 듯 느껴진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엘스트가 그린 ‘꽃 작품’을 소개한다. 네덜란드에는 꽃으로 유명한 나라답게 꽃을 그린 화가들이 많다. 꽃그림은 주로 허무함과 관련된 상징물들과 함께 그려지곤 했다. ‘꽃 작품’에서는 바로크 스타일의 검은 바탕 위로 조명을 받은 듯 선명한 색채의 꽃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꽃의 전성기임을 말해주듯 나비들이 앉아있다. 그런데, 그림 안에 어떤 상징적인 물건이 우연을 가장한 채 슬그머니 놓여있다. 오른쪽에 있는 포켓용 시계이다. 시계는 시간의 흐름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는 ‘이 아름다운 꽃들이 시간의 흐름에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시간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

인생의 유한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도서’는 성서 중 가장 조심스럽게 읽어야 하는 글로 알려져 있다. 자칫 인생을 비관하는 염세주의라든가, 무기력을 정당화하는 글로 해석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 유한하다’는 이유만으로 헛되다고 할 수는 없다. 허무함이라는 단어는 꽃처럼 찬란해 본 적이 있는 인생에 대해서만 쓸 수 있다. 단 한 번도 꽃피워보지 못한 인생을 두고 허무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번에는 꽃의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꽃같이 된 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세 마리의 개를 키우는 어느 시골집이 TV에 나왔었다. 개 이름은 각각 백구, 진순이, 노랑이이다. 백구와 진순이는 혈통이 있는 순종으로 귀족답게 양지바른 앞마당에 터를 잡고 있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집의 뒷면 쪽으로 가보니 노랑이가 산다. 노랑이는 백구나 진순이와는 달리 조상을 알 수 없는 못생긴 잡종견이다. 대문을 들어섰을 때 노랑이는 눈에 띄지도 않는다. 게다가 허드레 잡동사니만 잔뜩 쌓아놓는 그늘진 음지라 굳이 거기까지 둘러보는 식구는 없다. 주인 할아버지도 하루 한두 번 밥만 부어주고 갈 뿐이다.

노랑이는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무언가 해야만 했다. 구석에 버려져서 뒤집어져 있는 손수레 바퀴를 발로 굴려보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굴리다 보니 마치 곡예사가 묘기를 부리듯 능숙하게 네 발로 뛰면서 바퀴를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노랑이의 짧은 네 다리는 근육이 불거져 올라와서 말의 다리처럼 단단해졌다. 간혹 바퀴 사이에 끼어 다친 흔적이 다리 여기저기에 남아 있기도 했다. 무심하던 주인은 노랑이의 재주가 자랑스러워서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구경시켰다. 주인집의 이름도 어느덧 ‘노랑이네 집’으로 불리고 있었다.

해가 들지 않는 노랑이집은 이제 사람들이 모여드는 중심이 되었다. 노랑이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이다. 그 시린 외로움을 이겨내고 노랑이도 마침내 꽃을 피워냈다. 존재감을 느껴보기 위해 시작한 일이 주변에 외톨이로 잊혀져 있던 자신을 세상 속으로 꺼내놓은 셈이다.
꽃이 되는 일이란 그런 것이다. 세상의 중심에 스스로를 세우는 일이다.
그리고 한 번 꽃을 피운 인생은, 그 꽃이 사라진다 해도, 영원히 꽃이라고 할 수 있다.

/myjoolee@yahoo.co.kr

■사진설명=프레더릭 레이턴, '클뤼티에', 1895∼96, 캔버스에 유채, 156x137㎝, 개인 소장, 오스트레일리아(위쪽 작품). 윌렘 반 엘스트, '꽃 작품', 1663, 캔버스에 유채, 62.5x49㎝, 마우리취스,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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