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찍어 찍어!” “시민 치지 마!”
6월 1일 저녁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명 속에서 김촛불씨는 한 여대생이 수많은 전의경들에게 둘러싸여 몰매를 맞는 것을 봤다. 자신도 모르게 셔터를 눌렀다. 찰칵 소리도 없었다. 총천연색 화면이 파일 형태로 담겨지기 시작했다. 간부급으로 보이는 한 경찰관이 황급히 막아섰지만 때는 늦었다. 한 사람의 몸으로 막기엔 카메라 렌즈가, 터지기 시작한 플래시가 너무 많았다.
이날 수많은 군홧발들이 한 여대생을 짓밟는 동영상은 손수제작물(UCC) 사이트 ‘아프리카’에 올라왔고 식어가던 ‘촛불’의 열기를 재점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날 아프리카의 시청자 수는 127만명을 기록했다. 지난 6·10 항쟁을 기념해 100만명에 가까운 인파를 광장에 모은 원동력 중 하나는 촛불집회서 나온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이었다. 광복절을 기점으로 100회를 맞게 될 촛불집회. 삼삼오오 몰려나온 이들 대다수의 손에는 ‘그것’이 잡혀 있었다. 디지털 카메라다.
■싸이질 그리고 디카
‘1인 1디카 시대’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다. 하지만 국내에 디지털 카메라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년도 되지 않았다.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카메라 하면 ‘필름’을 떠올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디지털 카메라는 사용법이 복잡해 필름을 쓰는 카메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편했다. 더구나 국내 신문사의 사진부서에서 사용하던 전문가용 고급 필름 카메라가 200만원 정도였는데 막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한 디지털 카메라의 가격은 무려 2000만원이나 됐다. 당연히 일반 시민들에게 디지털 카메라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사진 작가들이나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기에 그 존재를 아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 2001년의 디지털 카메라 보급대수는 25만대에 불과했다.
‘빅뱅’이 일어난 건 2000년 이후였다. 막 태동하기 시작한 국내 디지털카메라 시장을 순식간에 황금 광맥으로 만든 일등공신은 한 인터넷 사이트였다. 바로 SK커뮤니케이션즈의 ‘싸이월드’다.
2001년 9월 서비스를 시작한 싸이월드는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나 불특정 다수의 인터넷 이용자들에게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공개할 수 있는 ‘미니홈피’를 만들어 이용자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2004년 싸이월드의 이용자 수는 1000만명이 넘어섰다. 사진을 찍어 미니홈피에 올리는 ‘싸이질’을 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디지털 카메라를 찾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필두였다. 교실에서 오가는 이야기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미니홈피를 만들어야 했고 사진을 올리려면 디지털 카메라가 있어야 했다. 필름값이 들지 않아 부담이 적고 컴퓨터에 연결해 미니홈피에 바로 사진을 올릴 수 있는 디카는 ‘빠름’에 익숙한 청소년들에게 꼭 맞는 기기였다. 필름을 사진관에 맡겨 인화한 후 스캔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 아날로그식 필름 카메라는 애초에 이들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싸이’를 기점으로 디지털 카메라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을 시작했다. 주인 없는 금광이나 마찬가지인 국내 시장에 캐논, 니콘, 소니 등 외국 카메라 제조 전문 업체들이 잇따라 진출했다. 본체의 소형화, 용량의 대형화, 고화질화 경쟁이 벌어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90년대 기껏해야 30만화소 수준의 이미지 센서에 필름 카메라와 비슷한 크기를 지녔던 제품들은 몇 년 새 몇백만 화소로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크기로 탈바꿈했다. 손떨림 방지, 얼굴 인식, 고감도 기술… 한 달이 멀다 하고 새로운 기술이 적용된 프로그램들도 앞다퉈 나왔다. 가격은 낮아졌고 수요는 늘었다. 돈 되는 디지털 카메라시장에 모두가 팔을 걷어붙인 결과였다.
지난 2007년을 기점으로 국내에 보급된 디지털 카메라 대수는 1000만대를 넘어섰다. 이제 거리에선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너무나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소문난 맛집에서 음식을 두고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는 이들의 모습도 일상이 됐다. 대학교 수업시간에는 손으로 필기하지 않아도 칠판을 디지털 카메라로 한 번 촬영하면 그만이다.
‘촛불’ 속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쥔 시민들은 자신들의 사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모두가 기록관이 되는 시대, 시민 저널리즘의 태동에도 디지털 카메라가 한몫을 했다. 10년 그 사이 디지털 카메라가 우리들의 삶을 바꿔 놓았다.
■컴퓨터 없는 세상, 상상 불가
PC, 퍼스널 컴퓨터라는 이름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도 불과 20년이 안 됐다. 그 이전에는 우리가 항상 작성하는 숙제나 리포트, 기획서도 일일이 자필로 써야만 했다. 건물을 세우기 위해 설계도를 그린다면 도면을 펼쳐 놓고 선 하나하나를 제도기와 컴퍼스를 동원해 그려야 했다. 컴퓨터가 생활 속에 녹아든 지금은 믿기 힘든 얘기다.
96년도 중반 ‘표준 컴퓨터’의 사양은 중앙연산처리장치(CPU) 인텔 펜티엄 100메가헤르츠, 하드디스크 용량 1.6기가바이트(�l), 8배속 시디롬이 장착된 제품이었다.
표준형 컴퓨터란 워드, 게임, 인터넷, 리포트 작성 등 개인 작업에 불편이 없이 쓸 수 있는 사양의 컴퓨터를 말한다.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표준형 컴퓨터의 CPU 속도는 아직 기가헤르츠 단위를 넘기 힘들었다. 하드디스크 역시 한자릿수 기가바이트 용량이 대세였다. 가격도 비싸서 ‘차 반 대 값’이라는 말이 반 농담일 정도로 비쌌다. 아직 플로피디스크를 들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지난 2007년도 말 인터넷 PC장터 ‘다나와’에서 추천한 최저가 표준 컴퓨터 사양은 하드디스크 160�l, 펜티엄 콘로 E2140, 메모리는 DDR2 1�l 램이 탑재됐다. 20만∼30만원이면 컴퓨터를 조립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켜는 것만으로도 모든 언론사의 뉴스가 들어오는 정보의 첨병. 게임과 수십 편의 영화를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엔터테인먼트 기기. 사람들을 이어주던 편지를 대신해 주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나의 컴퓨터가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TV에서는 고립된 채 살아갈 수 있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단 실험 참여자들에게 주어진 물품은 컴퓨터 한 대. 컴퓨터만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결론은 “YES”였다. 참가자들은 어느 정도의 불편만 감수하면 가능하다고 답했다. 온라인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대부분 조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싱싱한 야채까지 주문만 하면 얼마 안 돼 도착한다. 몇천 원만 지불하면 쇼핑도 대행해 준다. 언제 어디서든 컴퓨터만 있으면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사회인 ‘유비쿼터스’가 현실화된 것이다. 컴퓨터는 우리 몸의 일부가 됐다.
/fxman@fnnews.com 백인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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