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재근 코아스웰 회장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창업 초기의 역경도 신명나게 즐기며 국내 시스템사무가구 시장을 선도했다. 최첨단 유비쿼터스가구로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을 꿈꾸는 노 회장이 서울 당산동 본사 전시장(쇼룸)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서동일기자 |
샐러리맨이 꿈꾸는 이상 중의 하나는 기업 오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는 샐러리맨은 손에 꼽기 힘들다.
자의든 타의든 직장을 박차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 숨돌릴 틈도 없이 온갖 풍파가 휘몰아친다. 사정을 익히 아는 샐러리맨은 홀로서기가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수한 프런티어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그 고난의 문을 두드리고 번듯한 기업가의 꿈속으로 빠져든다. 기업 오너가 되는 길에 '왕도'는 없다. 그저 '남이 가지 않은 길'을 찾아내고 묵묵히 전력투구할 뿐이다. 샐러리맨에서 기업 오너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별을 딴 '승부사'들을 만나 '도전과 응전'의 역정을 들여다본다.
여덟 살 소년은 친구들과 작은 언덕에 올라 낙동강을 내려다봤다. '아…'. 유유히 흐르는 장대한 강줄기에 모두가 탄성을 지르지만 소년의 마음엔 '이 강을 헤엄쳐 정복해야겠다'는 도전심이 더 크게 자리잡았다. 수영을 전혀 못하던 소년은 '꿈'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날을 동네 앞 냇가에서 보냈다. 5년 후 열두 살이 된 소년은 마침내 혼자만의 힘으로 낙동강을 헤엄쳐 건너는 데 성공한다. 온몸을 던진 생애 첫 도전에서 얻어낸 강렬한 성취감은 소년에게 도전의 즐거움을 알게 했다. 연매출 700억원대인 사무용 가구업계의 선도기업 코아스웰 노재근 회장(63) 얘기다.
■37세 늦깎이 창업…직관에 인생을 걸다.
노 회장의 30대 중반까지 삶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해방 직후 부산 만덕동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남들과 다르지 않은 성장기를 거쳤고 굴지의 대기업에 취직, 승진가도를 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도전과 성취에 대한 남다른 열망은 잘나가는 샐러리맨의 삶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는 1973년 졸업과 동시에 굴지의 전자회사에 입사했다. 담당한 업무는 신제품 개발. 국내 전자업계가 꽃피우기 전인 당시 그는 신제품에 대한 영감, 신기술에 대한 정보 등을 얻고자 일본과 미국 등으로 출장을 자주 다녔다. 해외 전자기업들의 생산공장을 주로 방문하던 노 회장은 1980년대 초반 미국에서 한 기업의 사무실과 연구소를 구경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큰 충격에 휩싸인다. 부서별 업무능률을 높이기 위해 파티션을 설치한 업무공간과 그때까지 국내에서는 개념조차 없던 개인용 컴퓨터(PC) 사용 사무환경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의 업무효율성을 극대화한 시스템가구 등이 앞으로 국내 사무환경 분야에 열릴 '신세계'임을 직감했다.
'시스템가구는 국내에서 반드시 열릴 시장'이란 확신을 갖게 된 노 회장은 1983년 10월 과감히 사표를 던진다. 그리고 1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4년 11월 서울 당산동에 한국OA(현 코아스웰)를 창업한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일곱, 초등학교 진학을 앞둔 아들을 둔 가장이었다.
■창업과 동시에 찾아온 역경
코아스웰 설립은 노 회장에게 있어 인생의 전환점인 동시에 역경의 시작이었다. 노 회장은 "회사를 만들고 한동안은 사표 쓴 걸 후회했다"고 회고할 정도다.
당시 국내에는 시스템가구에 대한 개념이 전무했다. 당연히 이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 있을 리 만무했다. 노 회장은 시스템가구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훌쩍 떠난다. 현지 유명 사무가구업체들을 무작정 찾아다니며 한국 시장의 잠재력을 설명하길 수차례, 천신만고 끝에 한 회사와 기술제휴를 했다.
이를 바탕으로 노 회장은 국내 최초로 한국형 시스템사무가구를 출시한다. 업무공간에 적합한 맞춤형 설계로 사무실 내 동선을 25∼30%까지 줄인 것은 물론 파티션을 설치해 업무공간을 분리하는 파격적인 사무공간을 제공했다. 타자기와 철제 책상, 캐비닛 등으로 대표되던 당시 사무환경에 일대 혁명이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제품을 내놨지만 시장에서는 도통 '입질'이 없었다. 확신만 가지고 시장변화 속도를 너무 앞서 나간 것이 화근이었다.
시스템가구는 기본적으로 PC 사용 환경을 기반으로 한다. 창업 당시는 PC가 보급되기 훨씬 전으로 실제 근무환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비싼 가격도 문제였다. 효용성이 검증되지 않은, 개념조차 생소한 시스템가구 구입에 기존 가구의 10배가량 더 돈을 쓰려는 기업은 없었다.
노 회장은 제품을 들고 직접 영업망 개척에 나섰지만 신통치 않았다. 결국 전 직장에서 쌓아둔 인맥을 통해 알음알음 영업에 나서는 한편 일반적 형태의 기존 사무가구들을 생산하며 시장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좋다는데 뭐가 좋은지를 몰랐던 거지. 내가 쓰든 남이 쓰든 써봐서 좋은 걸 알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내가 먼저 쓰긴 부담스럽고. 제품 개발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걸 파는 건 몇 배는 더 힘들더라고."
■10년의 기다림과 도약
고전을 면치 못하던 코아스웰은 1990년대 초반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문민정부가 추진한 '행정전산화'가 사무환경 개선 바람을 몰고 온 것이다.
정부는 약 2000억원의 예산을 투자해 모든 정부부처에 PC를 보급하고 행정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사무환경 개선작업을 진행했다. 정부의 움직임에 기업들도 업무의 전산화 및 사무환경 개선작업에 적극 동참한다. 기업을 중심으로 국내 PC 보급대수가 500만대를 돌파한다.
바로 노 회장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스템가구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기업들은 허겁지겁 시스템가구 조달에 나섰고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시스템가구를 공급하던 코아스웰은 이 같은 수요를 독점하다시피 하며 폭발적 성장을 시작한다. 공장에서 생산된 사무가구들은 창고에 쌓일 틈도 없이 팔려나갔다.
"'이제 됐다!'라는 생각이 들었지. 처음에는 물건 팔러 다니기 바빴는데 한순간에 물건 만들기 바빠지더라고.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공장을 말 그대로 24시간 가동했어. 나나 직원들이나 힘은 들었지만 일할 맛 났지. 정말 밤을 꼬박 새워 일하고도 피곤한 줄 몰랐다니까."
시스템가구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후발업체들이 난립했고 코아스웰의 성장세는 다소 주춤해졌다. 위기감을 느꼈을 법도 하지만 노 회장은 오히려 '정공법'으로 시장을 공략했다. 꾸준한 신제품 개발과 품질 향상에 주력하면서 시장에 신뢰를 쌓은 것이다. 2005년 8월에는 코스피시장에 상장했으며 사무가구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에는 업계 최초로 금탑산업훈장도 받았다.
■새로운 도전, 세계를 꿈꾸다!
노 회장이 국내에 처음 선보인 시스템가구는 이제 최첨단의 유비쿼터스가구로 진화했다. 발전하는 정보기술(IT) 환경을 최대한 지원하고 작업자의 건강상태까지 확인, 최적의 근무여건을 만들어주는 한편 서랍에서는 필요한 물품이 자동으로 체크되고 개폐도 마그네틱카드를 이용한다. 주변에는 "'사양산업'에 왜 이리도 집착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가구산업에 대한 그의 철학은 확고하다.
"가구산업도 첨단환경에 맞추면 첨단산업이 되는 거야. 첨단 유비쿼터스기술을 접목하면 가구도 유비쿼터스가구가 되는 것 아니겠어? 사람들이 이렇게 간단한 원칙을 모르고 가구산업은 사양산업이라며 위기론을 퍼뜨리는 걸 보면 안타깝다니까."
남들은 은퇴를 준비하는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노 회장은 여전히 열정적으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코아스웰을 글로벌 브랜드로 세계 시장에 우뚝 세우겠다는 것. 코아스웰은 2005년 국내 업계 최초로 중국 빅토리사에 기술을 이전하며 중국시장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아시아, 중동, 중남미, 아프리카 등 전 세계 30여개국에 진출해 있다.
특히 노 회장은 단일시장으로 세계 최대 규모인 미국 본토시장 공략에 전사적 역량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말 글로벌 사무가구업체인 허먼밀러사 공식딜러와 업무제휴를 하고 미국시장 영업망 확대의 교두보를 마련한 데 이어 올해 초에는 미국 연방조달청 납품자격(GSA schedule)을 획득했다. 미국 본토뿐 아니라 전 세계에 분포된 미국 관공서 및 군부대 등에 납품할 수 있는 월드와이드 라이선스를 획득한 것은 코아스웰이 국내 업계 최초다. 현재 미 국무부, 연방수사국(FBI) 등과 납품협상을 하고 있다."국내 사무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하다 보니 어느덧 26년이 지났어. 별다른 비결은 없어. 그저 하고 싶은 일을 신명나게 해 온 것뿐이지.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의 성취감, 그 느낌이 좋았지. 이제와 돌아보면 아찔한 장면이 많았지만 후회는 없어. 앞으로의 목표? 지금껏 해 왔듯이 앞으로도 코아스웰을 키우기 위해 매순간 전력을 다해 일해야지. 이제 시작이야, 아직 갈 길이 멀다니까."
/yhryu@fnnews.com유영호기자
■노재근 코아스웰 회장 약력 △64세 △부산 △동아고 △동아대 기계공학과 △서울대 최고경영자 과정△한국OA(현 코아스웰) 대표이사 △한국금속가구공업협동조합 연합회 회장 △하이서울컴퍼니 대표자협의회 회장 △지식경제부 기술표준원 산업표준심의회 위원 △중소기업중앙회 해외진출기업지원 특별위원회 위원 △코아스웰 대표이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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