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그의 저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개항 이후 조선에서 가장 놀라운 행보를 보인 외국상품으로 등유 못지않게 성냥을 꼽았다. 1880년대 중반 이후 개항장인 부산.인천.원산항 등 3개항을 통해 성냥이 본격적으로 수입됐다. 절반 정도는 부산항을 통해 들어왔다. 1884년에 1만4874그로스(1그로스는 12다발)가 수입되기 시작해 10년 후인 1893년에는 680%나 늘어난 21만8910그로스에 달했다. 성냥 수입량 증가는 당시 우리 사회의 개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냥이 들어온 것은 개항 이후인 1879년께다. 통도사 승려 이동인(李東仁)은 일본에서 성냥을 가지고 와서 왕실과 세도가 앞에서 자랑스럽게 불을 켜 보이며 그들의 호기심을 돋우었다고 한다. 보통 10개 내지 20개의 성냥개비를 한 다발로 묶어 필요할 때 수시로 하나씩 집어 들고 벽이나 돌에 그어 불을 붙였다. 그 후 우리나라에는 중국상인과 일본상인들이 자국의 성냥을 수입해 경쟁을 벌였다. 중국성냥을 '되성냥', 일본성냥을 '왜성냥'으로 불렀다.
그리고 1886년 양화진에서 유럽인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냥이 만들어졌다.
여기서 제조된 성냥 60그로스가 처음으로 수출이 되는 기염을 보이기도 했지만 워낙 일본산 성냥이 대량으로 들어옴에 따라 결국 양화진성냥공장은 중국 천진으로 이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성냥제조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 인천에 세운 조선인촌주식회사에서 출발한다. 성냥제조용 목재는 대부분이 압록강 인근에서 벌목된 나무들로서 뗏목으로 운반돼 신의주제재소에서 가공이 된 것을 배와 기차 편을 이용해 인천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인천은 목재확보가 편리하고 서울이란 거대한 소비처를 배후에 둔 까닭에 우리나라 성냥공장의 시발점이자 본거지가 될 수 있었다. 이후로 전국에는 우후죽순처럼 성냥공장이 생겨났고 1970년이 되어서는 약 300개에 달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후반 일회용 라이터와 가스레인지의 등장은 마치 디지털카메라의 출현으로 코닥필름이 사양길로 걸었던 것처럼 바로 성냥공장에 직격탄이 됐다. 여기에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생산된 저가 일회용 라이터의 수입으로 더욱 경영을 어렵게 했다. 아직도 우리나라엔 2~3개의 성냥공장이 판촉용 성냥을 만들면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부산 인근 경남 김해에 있는 65년이란 긴 전통을 가진 '기린표 성냥'의 경남산업공사다. 몇 년 전에 이 회사는 일부 기계를 떼 내어 해외에 처분을 했지만 1970년대 호황기엔 중동과 아프리카에 수출도 한 기업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회사가 대체 어디에 기업정신과 가치를 두고 시대에 걸맞게 적자 사양산업을 계속해서 이끌어가는 것일까.
지난 2011년 일본 대지진 직후에 인천국제공항을 통한 성냥, 양초, 라이터 등 생필품의 일본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8800%나 폭증했다. 이것은 비상시국 일본에 긴급 공수돼야 할 물품이다 보니 항공화물로서 반출됐기 때문이다. 평상시에 우리는 성냥과 같이 시대에 뒤처진 제품에 대해서는 존재가치마저 잊고 산다. 그러나 지진 등과 같이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암흑천지가 된 세상에 무슨 첨단제품이 필요하랴. 오히려 사양산업이 만들어낸 기초 생필품이 더욱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가치를 지녔기 때문일 게다.
부산세관박물관장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