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자유화 개방바람이 불기 훨씬 이전인 1964년 2월 10일. 수입금지가 된 청어 2000상자가 부산세관에 들어왔다는 라디오뉴스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더구나 이 뉴스는 내일 모레면 설날이 다가오고 있어 마치 대목시장을 한탕 노려 수입한 수산물로 오해를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연근해에 청어가 나지 않아 오랫동안 그 맛에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돼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 느닷없이 "금지된 청어수입 배후에는 정치세력이 개입돼 있다"느니 "이미 통관돼 전주에서 팔리고 있다"는 등 헛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뉴스를 접한 청와대에서도 세관에 긴급 현황보고 지시를 내렸다. 사안의 중요성을 인식한 부산세관장은 소문을 빨리 종식시키기 위해 특정외래품으로 압류가 돼 있는 대한수산 냉동보세창고(당시 부산제빙회사) 현장에 직접 입회해 부산시경국장과 함께 밤을 새워 청어를 파악했다. 몇 번에 걸쳐 숫자를 확인했으나 청어 2000상자는 아무 이상 없이 그대로 있는 것으로 판명됐다.
이어서 세관에서는 수입경위를 알아보고 화주로 하여금 일본으로 반송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화주가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수입대행업체의 협조를 받아 실화주가 사는 마산으로 세관 수사진을 급파시켜 화주를 찾기 시작했다. 수소문 끝에 화주를 마산시 월남동에서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당시 58세 된 김아무개 여성이었다.
김 여인의 본남편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자수성가한 재일동포였다. 3년 전에 남편이 돌아가면서 유언으로 마산의 본부인에게 당시 일본 돈으로 1300만엔의 유산을 물러주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 여인은 남동생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한국으로 유산을 가져갈 방법을 연구했으나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아 송금상 문제가 많았다.
결국 이들은 우리나라에서는 금값인 청어가 이곳 일본에서는 값이 싸서 이걸 수입해 가면 일거양득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주일한국대표부에 들러 유산에 대해 면담을 하던 중 담당자가 금지품목에 청어가 속해 있는 줄을 모르고 수입이 가능하다는 듯한 이야기를 듣고 더욱 확신을 얻어 수입을 하게 됐던 것이다.
이러한 수입경위를 파악한 세관은 그전에도 청어가 목포항에 들어와서 통관이 되지 않은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 전례에 따라 반송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김 여인은 일본에 화물을 받을 사람이 없다며 극구 반대를 하면서 남편의 유산만은 헛되이 할 수 없다며 백방으로 수입통관을 위해 부지런히 뛰었다. 그러나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1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창고보관료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다행히 이 딱한 소식을 들은 어느 제과회사에서 청어를 구입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청어를 제과용 원재료로 이용하겠다는 취지였다. 이러한 제과회사의 요청에 따라 먼저 머리와 뼈를 추리고 청어살로 된 필레트를 만드는 보세작업을 거쳐 결국은 청어가 아닌 가공식품 원재료인 필레트로 통관이 됐다.
남편이 남긴 유산 때문에 도움은커녕 재미는 창고업자가 보고 오히려 부인은 온갖 고생과 손해만 본 청어수입 소동이었다. 그리고 전주시장에 나온 청어 2상자(80여 마리)는 재일동포 송아무개씨가 군산에 있는 본가에 설을 새러오면서 세찬용으로 휴대 반입한 것이 시장에 흘러나왔던 것으로 판명됐다.
수입통관·시장성에 대한 사전정보도 없이 무조건 수입해서 돈을 벌고 보겠다는 기대심리가 이처럼 큰 폐단을 낳기도 했지만 청어수입 소동을 통해서 당시의 사회 및 정치상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부산세관박물관장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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