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영화 '카운트다운'을 끝내고 집에서 쉬고 있을 때, 아니 전도연(사진)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놀고 있을 때' 그는 이 작품의 얼개를 봤다. 단번에 끌렸지만, 구체적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풀릴지가 궁금했다. 완성된 시나리오를 본 건 지난해 10월이었다. 그는 두말 않고 "저 할게요" 번쩍 손을 들었다. 2년의 악몽 같은 시간을 산 평범한 주부 정연의 여정은 그 후 서서히 전도연의 숨결로 옮겨갔다.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은 주부 정연의 험난한 귀환기를 다룬 실화다. 남편 종배(고수)의 잘못된 빚보증으로 전셋집에서 쫓겨나고 단칸방 월세도 못 내는 궁핍한 생활을 하던 정연은 운석을 운반해주는 대가로 한 번에 400만원을 벌 수 있다는 남편 후배의 제안에 생애 처음으로 국제선 비행기를 탄다. 하지만 정연이 운반한 것은 운석이 아니라 마약이었다. 프랑스 현지 공항에서 체포된 정연은 대서양 한복판 마르티니크 감옥에 갇힌다. 신체의 자유가 박탈당한 곳에서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현실의 고통은 극한의 공포 그 이상이다.
"정연은 단순 가담자였다." 이 한 줄의 한국 정부 공식문서만 확인됐다면, 그는 그 억울한 옥살이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를 수수방관한 정부의 무능과 안일함에 관객은 치를 떤다. 높으신 양반들 의전에만 신경 쓰는 해외 공관들, 교도관들의 무자비한 폭행, 민간인보다 못한 정보력의 뒷북 한국 검찰, 모두가 비난의 도마에 오를 메뉴다.
지난 10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전도연은 "영화가 끝났는데도 여전히 아프다"고 했다. 촬영 기간엔 "정말 정연을 잘하고 싶은데, 그 2년의 감정을 제대로 압축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무서움으로 돌변한 때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예상대로 전도연은 절절한 연기로 스크린을 압도한다. 딸과 남편이 있는 집을 향한 그리움이 전도연의 눈빛, 표정, 몸짓으로 사무치게 표현된다. 하지만 전도연은 감정을 완전히 폭발시키진 않는다. 의외로 억누르고, 다스린다. "그것이 정연의 그 당시 모습이었을 것"이라는 게 전도연의 말이다. "정연은 오히려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 그 희망을 놓쳐선 안 되겠다 싶었을 거예요. 이미 다큐멘터리로 나왔고, 이 실화를 아는 사람은 많습니다.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고 싶진 않았습니다."
전도연은 가족의 소중함을 보여주는 데 온 감각을 다 동원했다고 했다. "영화에서 그게 느껴지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잖아요. 가족에서 시작해 가족으로 끝나는 이야기니까요. 작고 소박한 이야기입니다. 그게 가장 큰 포인트일 거예요."
그의 절절한 연기에 혹여 비법이라는 게 있을까. 그는 "감정은 연습으로 되는 게 아니다"라면서도 "그 대신 감정을 기억하는 건 대단히 중요하다"고 했다. "처음 시나리오 읽었을 때 느낀 감정이 대체로 정확해요. 그 작품에 빠져 있지도 않고, 객관적으로 그 상황을 보는 때가 그때니까요. 촬영이 순서대로 되는 게 아니어서 내가 읽었던 감정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슬프다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슬플 순 없으니까요."
전도연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 자신이 꿈꿔왔던 것과는 반대로 흘러왔다는 게 오히려 흥미롭다. 그는 배우를 꿈꾸지도 않았고,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느껴본 적도 없으며, 연기를 잘하고 싶은 욕심도 없었던 사람이다. 대략 연기를 처음 시작하던 무렵 이랬다는 이야기다. "결혼해서 아이 키우는 게 정말 꿈이었어요. 말 그대로 현모양처요. 내 안에 재능이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했으니까요."
하지만 영화 '접속'으로 시작해 '약속' '해피엔드' 등으로 그의 끼는 분출했고 '내 마음의 풍금' '인어공주' '피도 눈물도 없이'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등을 지나 그에게 '칸의 여왕' 타이틀을 안긴 '밀양'까지 그는 연기로 승부를 낼 줄 아는 충무로 대표 여배우로 군림한다. 이 먼 길을 돌아 그의 애초 꿈 '현모양처'에 이른 지금, 그의 고민은 다시 "작품에 목마르다"는 것이다.
전도연은 영화가 하나 끝났는데도 또 다른 영화가 있다는 것에 안도감마저 느낀다. 그는 현재 이병헌과 무협극 '협녀'를 촬영 중이다. '그래비티' 같은 SF나 코미디, 뭐든 해보고 싶다는 그는 "어느새 부담으로 느껴지는 내 위치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를 가둔 틀을 깨고 싶다"며 빙긋이 웃었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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