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타임 3시간, 순식간에 흘러가
18일까지 이태원로 블루스퀘어
18일까지 이태원로 블루스퀘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떠난 뒤에도 남는 묵직한 존재감. 그것이 어쩌면 생의 유일한 목적일지도 모르겠다. 무에서 유로, 또 유에서 무로 흐르는 인생 속에서, 모든 것이 무위가 된 후에도 이름으로나마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다면 그것만이 불멸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들이 있다. 희대의 악녀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강렬하게 그 자신의 인생을 산화시켰던 사람. 그래서 그을음처럼 누군가에게 흔적으로 남은 강렬한 이름. 뮤지컬 '레베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그 이름의 주인공 '레베카'의 모습을 보면 누군가의 가슴에 사무치게 남는 이름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작품의 전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세 사람. 나와 막심 그리고 댄버스 부인이지만 레베카의 환영은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깃들어 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사고를 당했다는 막심의 전 부인 레베카는 러닝타임 2시간45분 동안 얼굴과 목소리 한 번 비치지 않지만 무대에 오르는 모든 캐릭터의 마음을 지배한다.
반면 가장 많이 무대에 오르고 노래하는 주인공 '나'의 본명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불려지지 않는다. 미국의 졸부 반호퍼 부인의 비서로 있다가 영국 콘월 지방의 귀족 막심 드 윈터와 결혼하면서 '미세스 드 윈터'라는 호칭을 얻게 될 뿐이다. 이 뮤지컬은 1인칭 관점의 '나'가 막심과 결혼 후 일련의 미스터리한 사건을 겪으면서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나'는 끝까지 주연임과 동시에 조연인 이중적인 스탠스를 벗어날 수 없다. 이름없는 '나'와 이름만 남은 '레베카'는 무대 속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이 흘러 맨덜리의 기억을 되짚어가는 '나'는 프롤로그에서 "과거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한다.
앞에 드러나지 않은 이 갈등은 매혹적이고 치명적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어릴 때부터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더 많이 받고 칼날같은 미소를 갖게 된 레베카는 그에게 매혹당했던 모든 사람과 마음 속에서 전쟁을 치른다. 마음을 사로잡혔던 사람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이는 댄버스 부인이다. 그에게 레베카는 '영원한 생명'을 품은 불멸의 뮤즈다. 이미 난초가 죽기 직전에 피우는 꽃처럼 쉽게 세상을 놓았으리라고 인정할 수 없다. 애정은 광기로 변하고 모든 이들에게 위협적이나 파도소리를 들어도 레베카의 목소리로 듣는 댄버스 부인은 실상 가장 나약한 존재다. 결국 '레베카'가 스스로의 죽음으로 세상에게 쏟아붓는 기만에 가장 먼저 불살라지는 사람은 댄버스 부인이다.
반전과 반전이 거듭되는 치밀한 스토리에 아름다운 음악이 더해졌다. 그리고 역대 최고의 캐스팅. 가장 약한 캐스팅이 정성화가 아니냐고 할만큼 캐스팅이 두텁다. 여름부터 시작해 말미를 향해 달려가는 이 공연은 이례적으로 예매점유율 1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벌써 네번째 공연임에도 여전한 인기에 공연 기간도 당초보다 더 연장했다. 적어도 올 하반기 국내 뮤지컬 시장의 권좌를 차지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공연은 18일까지 서울 이태원로 블루스퀘어.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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