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치일반

[역사줌인] '남산의 부장들'과 박정희 정권의 末期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1.24 00:10

수정 2021.04.17 09:50

1979년,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꾼 5가지 장면들 
[역사줌인] '남산의 부장들'과 박정희 정권의 末期
[파이낸셜뉴스] "여기 중앙정보부야.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거 빼고 다 할 수 있는 곳이지. 죽었다 치고 다 말해봐. 뭐 재미있는 거 아는 거 같은데."

박정희 정권 18년을 지탱해온 두 개의 지주가 있었다. 하나는 경제중흥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정보정치'였다. 정보정치의 심장부에는 '정치공작사령부'로 불렸던 남산의 '중앙정보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중앙정보부. 그 이름만 들어도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다는 '공포'의 권력기관. 수많은 정치공작과 폭력을 자행하며 엄혹한 밤의 역사를 창조해낸 음지의 괴물.

중앙정보부를 창설했던 제 1대 '김종필' 부장, 남산돈까스라 불렸던 제 4대 '김형욱' 부장, 정보정치의 귀재라 일컬어졌던 제 6대 '이후락' 부장, 역적과 의사 사이를 오가는 제 8대 '김재규' 부장, 중앙정보부의 간판을 내리고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간판을 변경한 제 10대 '전두환' 부장까지. 중앙정보부의 정점엔 이들 '부장'들이 있었고, 중앙정보부장과 중앙정보부의 역사는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위치했다.

'남산의 부장들'이란 영화는 이들 중 박정희 정권 말기에 있었던 일부 '중앙정보부장'(김재규·김형욱)들의 흥미진진한 비화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중앙정보부장과 그 주변인, 주변 상황을 토대로 한 이야기를 통해 박정희 정권의 몰락과 본질을 되짚어본다.

■韓-美, 박정희-카터 갈등
1977년, 미국의 제 39대 대통령으로 지미 카터가 취임했다. '도덕 정치'와 '인권 외교'를 표방한 카터 행정부는 이전 행정부와 달리 박정희 정권 18년 장기집권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그 당시 카터는 사석에서 박 정권을 '제거돼야 할 악마의 정권'으로 부르기도 했고, 방한 때 가졌던 박정희와의 회담을 '그동안 동맹국 지도자들과 가진 회담 가운데 가장 불쾌한 회담'이었다고 평가절하했다. 반대로 한국의 민주주의와 학생운동을 옹호했고, 김영삼 등 야당 지도자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박 정권은 유신독재 체제를 포기할 뜻이 없었고,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여갔다.

박정희와 카터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도 수면위로 부상했다. 카터 행정부는 주한미군 철수 카드를 통해 박 정권 유신체제의 변화를 압박했다. 이에 대응해 박 정권은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모색했다.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 세계적인 핵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도 비밀리에 핵개발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즈음 의문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일각에선 이 박사의 죽음에 미국 CIA가 개입됐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이 박사가 실제 박 정권의 핵개발에 관여하지 않았음은 물론 핵개발 자체를 반대했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 핵개발의 핵심주체였던 박정희가 암살당한 후 한국의 핵개발은 중단된다.

이처럼 박 정권 말기엔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전례없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18년동안 이어져온 박 정권의 운명도 마침표를 향해 치달았다.

[역사줌인] '남산의 부장들'과 박정희 정권의 末期
■김재규-차지철, 중정-경호실 파워게임
민주화 이후 정부들에서 양대 권력기관이라고 하면 대개 검찰과 경찰을 꼽는다. 그러나 당시 박 정권 하에서 양대 권력기관을 꼽으라면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경호실을 들 수 있다. 검찰과 경찰은 표면적인 권력기관에 불과했고, 물밑에선 중정과 경호실이 대표적인 권력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에 따라 이들 기관의 권력 남용도 다분하게 발생했고, 박 정권 유신체제가 지속되는 근거를 제공했다.

양대 권력기관이다 보니 중정과 경호실간 권력다툼도 치열했다. 이전 이후락 중정부장과 박종규 경호실장의 숨은 알력도 있었지만, 박 정권 말기 김재규 중정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권력다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김재규는 육군 중장 출신으로 보안사령관, 건설부 장관, 중정부장 등 박 정권 시절 요직을 두루 거쳤다. 차지철은 육군 중령 출신으로 국회의원으로 적잖게 활동하다 경호실장까지 지내게 된다.

이 두 사람은 박 정권 말기에 사사건건 충돌했다. 민주화 운동 및 야당 대응, 김형욱 사건 대응 등에 있어서 둘은 항상 의견이 엇갈렸다. 김재규는 대체로 온건파였지만, 차지철은 언제나 강경파에 속했다. 김재규는 때론 박정희의 심기에 거슬리는 말도 했지만, 차지철은 박정희의 심기에 부합하는 말만 했다. 초반 박정희는 김재규의 말을 귀담아 들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김재규를 멀리하고 차지철에게 힘을 실었다. 그러면서 박 정권의 노선은 더욱 강경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중앙정보부와 경호실의 파워게임은 김재규와 차지철이라는 두 수장의 근본적인 신념 및 기질 차이, 그리고 대통령의 신임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이는 두 권력기관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형욱 납치암살 사건
김형욱은 역대 중정부장들 가운데 최장수 부장이었다. 1963년부터 69년까지 무려 6년 이상을 중정부장으로 있으면서 민주화 운동을 극심하게 탄압했고, '남산돈까스'라는 악명을 떨쳤다. 심각한 국제 문제로까지 비화됐던 '동백림 간첩단 사건'은 그가 행한 대표적 탄압 사례였다. 민주화를 열망했던 국민들에게 김형욱은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대체로 강경책을 선호했던 박정희에게 있어 김형욱은 '효과적인' 쓰임새를 갖고 있는 심복이었다.

박정희의 신임을 한몸에 받던 김형욱은 1969년을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당시 이만섭 의원 주도로 김형욱 부장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박정희에게 전달됐고, 야당과 여론의 끈질긴 요구로 결국 김형욱은 중정부장에서 해임됐다. 이후 그는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지만, 1972년 유신 선포 후 의원직마저 박탈당하게 됐다.

일련의 사건으로 권력의 중심부에서 멀어지고 박정희에 대한 원망을 쌓아가던 김형욱은 중정부장 시절 최측근이었던 문학림과 함께 타이완으로 출국, 이후 미국 뉴욕에 머무르게 된다. 사실상의 '도피'였다. 박정희는 김형욱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김종필, 정일권 등 고위급 인사들을 보내 설득을 이어갔지만, 모두 허사였다.

문제는 1977년에 발생했다. 미국 정가를 발칵 뒤집어놨던 '박동선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터진 후 김형욱은 미국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박 정권의 은밀한 사건들을 폭로했다. 여기에 더해 박정희의 사생활을 담은 회고록을 일본에서 출간했다. 이를 계기로 김형욱은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셈이다.

초조해진 박 정권은 김형욱 제거 작전에 돌입했다. 제거 작전에 나선 주체가 김재규의 중정인지 아니면 차지철의 경호실인지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1979년 10월 김형욱은 한국에서 급파된 공작원들에 의해 파리에서 납치돼 행방이 묘연해졌다. 현재까지도 김형욱이 언제 어디서 최후를 맞았는지 확인된 바는 없고, 표본적 미제 사건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다.

[역사줌인] '남산의 부장들'과 박정희 정권의 末期
■김영삼 제명과 부마 항쟁
박 정권에 대항하는 대표적인 민주 투사이자 야당 지도자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김대중이었다. 특히 김영삼은 보다 강경한 투쟁 방식을 구사하는 정치인으로 인식되곤 했다. 이러한 김영삼의 투쟁 방식은 1979년에 정점에 이르렀다.

1979년 8월, 가발 수출회사인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72명은 근로조건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신민당 당사에 모여들었다. 김영삼은 이들과 면담을 갖고 함께 투쟁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박 정권은 대규모 경찰병력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김영삼은 신민당 당사 주변에서 경찰청 정보과, 보안과 형사들을 발견하면 멱살을 잡고 뺨을 때렸고, 심지어 진압작전을 지휘하는 마포경찰서장을 만나서도 "너희들이 저 여공들을 다 죽일 셈이냐"고 외치며 뺨을 때렸다.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들과 당직자들도 결연한 투쟁의지를 내비쳤다.

결국 박 정권의 경찰병력은 신민당 당사 안으로 쳐들어갔고,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며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연행했다. 이 와중에 건물옥상에서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YH무역 사건 직후 김영삼은 미국 '뉴욕타임즈'와 기자회견을 가진다. 그는 이 회견에서 박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인 제어와 지지 철회를 강하게 요구했다. 회견의 파급력은 상당했다. 하지만 이는 김영삼을 제거하는데 혈안이 된 박 정권에게 유용한 빌미를 제공했다. 박 정권과 여당인 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는 김영삼의 기자회견 발언을 '사대주의'로 규정했고, 국회에서 김영삼에 대한 징계동의안 제출 및 국회의원직 제명을 추진했다. 신민당 의원들이 이를 저지하고자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했지만, 여당은 경찰력을 동원해 김영삼 제명안을 단독으로 날치기 처리했다.

신민당과 민주통일당 의원들은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했고,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 및 마산에서도 거센 반발 움직임이 나타났다. 결국 해당 지역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부마항쟁'이 촉발됐다.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 및 일반시민들은 김영삼에 대한 탄압 중단과 유신독재 타도를 외쳤다. 날이 갈수록 시위 규모는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됐고, 박 정권은 비상계엄령 선포와 공수부대 투입을 강행하기에 이른다.

■궁정동 총성
1979년 10월 26일의 그날은 비교적 맑았다. 박정희는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을 궁정동 안가로 불러 연회를 할 예정이었다. 차지철로 인해 두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김재규는 박선호 의전과장 등을 통해 연회를 준비했다.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심재순이 연회에 섭외됐다. 이들 외에 김재규는 뜻밖의 인물들도 섭외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섭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였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국가의 실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정승화 총장의 힘을 사전 포섭해놓기 위해 궁정동으로 불렀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 정승화와 김정섭은 궁정동 '가'동으로 들어가 식사하며 김재규를 기다렸다. 그들 역시 곧 닥칠 역사의 소용돌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후 6시, 박정희와 차지철, 김재규와 김계원은 연회장이 마련된 궁정동 '나'동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곧 전통 한국식 만찬 교자상 앞에서 술을 겸한 저녁 식사를 했다. 국가의 최고 권력자들이 모여있는 식사 자리인 만큼, 정치 현안과 관련된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분위기는 금세 어두워졌다.

특히 박정희는 김재규의 중정이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과 야당의 투쟁 등에 대해 강경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여기에 차지철까지 나서 김재규 중정의 온건한 대처 방식을 공격했다. 급기야 박정희는 시민들에 대한 '발포' 가능성도 언급했고, 차지철은 "반항하는 자들은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는 험악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박정희와 차지철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던 김재규는 끓어오르는 반감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저녁 7시 30분경, 그는 잠시 밖으로 나가 중정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박선호 의전과장을 호출했다. 그러고 나서 박정희, 차지철에 대한 암살과 경호실 사람들 제거 계획을 알렸다. 박흥주와 박선호는 처음엔 당황했지만, 오랜기간 따랐던 상관 김재규의 계획과 지시를 거부하지 못했다. 김재규는 이것을 '혁명'이라고 규정했다.

이후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7시 41분경, 심재순이 노래를 부르는 와중에 김재규는 갑자기 박정희에게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고 외쳤고, 이내 권총을 뽑아 차지철을 쐈다. 김재규가 쏜 총탄은 차지철의 오른손목을 관통했다. 이어 김재규는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두번째 총탄을 발사했다. 박정희는 많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차지철은 연회장 옆 화장실로 도망쳤다. 김재규가 총을 쏘자 대기하고 있던 박흥주와 박선호도 기민하게 움직여 차지철이 지휘하는 부하 경호원들을 제거해 나갔다. 김재규는 박선호로부터 새로운 총을 받아들고 연회장으로 다시 돌아가 그때까지 숨이 붙어있던 박정희와 차지철을 완전히 사살했다.

김재규는 거사 직후 정승화 총장을 데리고 남산 중앙정보부로 향했다. 그는 정승화에게 박정희의 죽음을 알렸다. 그러나 중정으로 향하던 도중 정승화의 의견을 수용해 육군본부로 방향을 틀었다. 김재규에게 있어 중정이 후속 조치를 취하기 용이한 장소였지만, 그가 육본으로 '운명의 유턴'을 한 것은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육본에서 열린 긴급 국무회의에서 김재규는 대통령의 유고를 발표했고, 즉각적인 계엄령 선포를 최규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사건 현장에 같이 있었던 김계원의 밀고로 김재규는 체포됐다.

추후 법정에서 김재규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야수의 심장'으로 박정희를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사형 판결 직전 법정에서 행한 최후 진술은, 이 같은 주장이 허언이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핵심 요소로 부각되곤 했다. 이에 따라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김재규를 민주화 투사로 인정하자는 의견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선 차지철과의 권력암투에서 밀리는데 따른 충동적인 범행이었다는 주장과 미국이 박정희 암살을 암암리에 사주했다는 설이 나오기도 했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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