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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고산습지④] 습지보호지역 1호…자연사박물관이 따로 없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11.14 02:43

수정 2020.11.14 12:22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 ‘물영아리’ 화구호
하늘에서 본 물영아리 화구호 [사진=제주도 제공]
하늘에서 본 물영아리 화구호 [사진=제주도 제공]

【제주=좌승훈 기자】 한껏 올라가 버린 푸른 하늘. 한 해를 마무리 짓는 가을의 끝. 가을이 깊어지자, 산 속의 바다도 깊어졌다. 이른 아침,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 물영아리로 가는 길에 억새군락이 영롱한 아침이슬을 맞아 반짝인다. 장관이다. 늦가을의 마지막 향기를 마음껏 발산하고 있다.

표고 508m의 물영아리는 2000년 12월11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습지보전법에 따른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우리나라 습지보호지역 1호다. 지정면적은 30만9244㎡. 산꼭대기에 습지가 형성된 특이한 곳이다.

■ 신령스러운 오름 “비가 내리면 물이 고여 연못이 된다”

습지보전지역 지정에 앞서 한국자연보전협회와 환경부 생태조사단은 1998년과 1999년에 물영아리에 대한 식생 조사를 통해 습지식물 171종과 양서·파충류 15종, 곤충 47종이 서식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당시 동행 취재에 나섰던 EBS 촬영팀은 환경프로그램 ‘하나뿐인 지구, 섬 위의 섬-제주의 원시 늪’ 프로그램을 통해 개구리를 토해내는 뱀의 모습, 소금쟁이가 자신보다 세 배나 더 큰 개미를 공격해 잡아먹는 모습, 대륙유혈목이가 나무를 타는 모습, 잠자리 애벌레가 새끼 도롱뇽을 공격해 잡아먹는 모습 등을 생생하게 보여줘 큰 관심을 모았다.

이곳은 제주도 기생화산의 대표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더욱이 전형적인 온대 산지 늪의 독특한 생태계를 잘 간직하고 있어 보존가치가 크다. 특히 습지의 천이과정을 제대로 알 수 있어 자연사 박물관으로 불리는 이탄층(泥炭層)이 폭넓게 형성돼 있다.

문영아리 화구호 [제주관광공사 제공]
문영아리 화구호 [제주관광공사 제공]

화구호는 둘레 300m·깊이 40여m에 달하며, 함지박 형태를 띠고 있다. 현무암질 용암이 분출해 생긴 기생화산이며, 오름 안팎에는 ‘스코리아(scoria)’라고 하는 다공질(多孔質)의 화산쇄설물이 널려 있다.

제주사람들은 이를 ‘송이’라고 부른다. 화산 폭발시 점토가 고열에 탄 화산석인 돌숯을 가리킨다. 송이는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에 의해 엄격하게 보호되고 있어 허가를 받은 장소에서만 채취해야 하며, 완제품이 아닌 상태에서는 도외로 반출할 수 없다.

최근 가을가뭄 탓인지 화구호의 물은 빈약했다. 못 중앙으로 나아갈수록 마른 수초로 덮여 누르스름한 못 바닥은 한발 내디딜 때마다 푹푹 빠질 정도였다. 이곳은 건조기 때 습지를 형성하다가도 집중호우가 내리거나 장마철이 되면 수위가 1m까지 올라간다. ‘물영아리’라는 지명도 ‘비가 내리면 물이 고여 연못이 된다’는 데에서 유래됐다.

■ 분화구형 람사습지…국내 미기록종 '영아리 난초' 발견

수망리 청년들은 1999년부터 ‘물영아리 오름 환경감시단’ 활동을 펴 왔다. 이들이 물영아리 오름 보호에 나선 것은 당시 환경부가 마련한 지역주민 공청회가 계기였다. 물영아리 습지는 한국에서 유일한 분화구형 습지로 전 세계 어떤 습지와 비교해도 제주만이 갖고 있는 기후와 지형적인 특색을 잘 보여준다. 습지보전법이 시행된 후 국내 미기록종 난초도 발견됐다. 이름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물영아리오름에서 발견됐다고 해서 '영아리 난초'다.

물영아리에 서식하는 무당개구리
물영아리에 서식하는 무당개구리

남원읍 습지지역관리위원회가 중심이 돼 ‘물영아리 람사르 습지문화제’도 개최되고 있다. 람사르 습지도시 인증 후보지로 선정된 이후, 2016년부터 꾸준히 개최되는 축전이다. 이들은 2021년 열리는 제14차 람사르총회에서 남원읍이 람사르 습지도시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습지 보존 관리에 적극 나서고 있다.

앞서 이곳은 습지보호지역 지정 이후 6년 동안 출입이 금지됐다가 2007년 국내에서 5번째, 세계에서 1648번째 국제 람사협약 습지로 등록되면서 일반에 개방됐다.

‘영아리’는 영산(靈山)을 말하며, 신성하고 영험하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물’은 산정 화구호를 의미한다.

1653년(효종 4)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이 기록한 ‘탐라지’(耽羅志)에는 ‘수영악(水盈嶽)’으로 표기돼 있다. 수령산(水靈山) 또는 수령악(水靈岳)이라고도 한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는 ‘물영아리악(勿永我里嶽)’이라 돼 있고, 오름의 정상부는 ‘유수(有水)’라고 기록돼 있다. 탐라순력도는 1702년(숙종 28)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이 제주도를 돌면서 화공 김남길(金南吉)에게 그리도록 해 만든 화첩이다.

■ 목장 물이 마르면, 방목된 소들은 물 찾아 오름 정상으로

물영아리 지명에 얽힌 전설도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음 수망리에 민가가 살기 시작한 때, 들에 놓아 기르던 소를 잃어버린 한 젊은이가 소를 찾아 들을 헤매다 이 오름 정상까지 올라가게 됐다. 젊은이는 정상에서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기진하여 쓰러져 있었는데, 그때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물영아리에 방목된 소 [사진=제주관광공사]
물영아리에 방목된 소 [사진=제주관광공사]

노인은 “소를 잃어 버렸다고 상심하지 말아라. 내가 그 소 값으로 이 산 꼭대기에 큰 못을 만들어 놓을 테니, 아무리 가물어도 소들이 목마르지 않게 되리라. 너는 가서 부지런히 소를 치면 살림이 궁색하지 않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번쩍 눈을 떠보니 하늘이 갑자기 어둑어둑해지더니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삽시간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놀라 허둥대는데, 이상하게 자기 옷은 하나도 젖지 않고 있는 걸 깨닫고, 꿈에 본 노인의 말이 생각났다.

그때였다. 우르릉~쾅! 하늘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불이 번쩍 눈을 스쳐갔다. 젊은이는 그냥 쓰러져 혼절했다. 젊은이는 뒷날 아침에야 정신을 차렸다. 언제 번개치고 비가 내렸었냐는 듯이 날이 갠 상태였다. 그가 쓰러졌던 정상은 넓게 패어져 있었고, 거기에는 물이 가득 차서 출렁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가물어도 그 오름 꼭대기에는 마르지 않는 물이 고여 있어, 소들이 목장에 물이 말라 없으면 그 오름 위로 올라간다고 한다」

물영아리오름은 수망리 중잣성 생태 탐방로와 연결돼 있다. 잣성은 조선시대에 제주 중산간 목초지에 만들어진 목장 경계용 돌담이다.
잣성은 제주 전통 목축문화의 대표 유물이며, 위치에 따라 제주도 중산간 해발 150m~250m 일대의 하잣성, 해발 350m~400m 일대의 중잣성, 해발 450m~600m 일대의 상잣성으로 구분된다.

오름은 크든 작든 정상에 올라야 제 맛이다.
물영아리 탐방은 소떼가 유유히 노니는 목장 둘레를 따라 반 바퀴를 돌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물영아리오름 탐방로 [사진=제주관광공사]
물영아리오름 탐방로 [사진=제주관광공사]


jpen21@fnnews.com 좌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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