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많으면 회의 길어져"
모리 前 총리 발언이 불러온 나비효과
여학생 점수 깎은 의대 입시비리에도
전세계 미투열풍에도 '체념'하던 일본
지난달 모리 올림픽조직위 회장 발언 논란
해외 언론 비판 등에 결국 자리 내놔
SNS 사용 활발한 젊은 세대 중심으로
여성 인권 강화 목소리 연일 확산
성 격차지수 121위인 日, 이번엔 바뀔까
모리 前 총리 발언이 불러온 나비효과
여학생 점수 깎은 의대 입시비리에도
전세계 미투열풍에도 '체념'하던 일본
지난달 모리 올림픽조직위 회장 발언 논란
해외 언론 비판 등에 결국 자리 내놔
SNS 사용 활발한 젊은 세대 중심으로
여성 인권 강화 목소리 연일 확산
성 격차지수 121위인 日, 이번엔 바뀔까
다음 장면은 더 놀라운 것이었다. 일본 여성 의사 65%가 학교 측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답한 것이다. 여성 의사들은 "임신, 출산으로 인해 병원 측에 부담을 준다" "휴일, 심야까지 진료하고 유산을 반복했다"는 등의 이유를 밝혔다. 이런 태도를 놓고 일종의 '체념'이라는 분석이 잇따랐다. 전 세계를 휩쓴 '미투 운동'(Me, too·나도 당했다)도 일본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121위.'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153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성격차지수에서 일본이 받은 성적표(한국은 108위)다.
의도적 차별과 배제에 '체념하던' 그런 그녀들을 다시 한번 자극한 사건이 지난 2월 터졌다.
총리(2000~2001년) 출신인 모리 요시로 당시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 회장(83)이 일본올림픽위원회(JOC)의 여성 이사 증원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피력하며 "여자가 많으면 회의시간이 길어진다"는 발언을 내놓은 것이다. 사실 그 뒤에 말이 일본 여성들을 더욱 화나게 했다. "여기 계신 여성 이사 일곱분들은 '분별'이 있으시니까(분수를 알고 입 다물고 있어서 다행이다)."
'분별있는 여성(분수를 아는 여자)'은 적당히 알아서 입 다물고, 남성 중심의 질서에 순응하는 여성들을 의미한다. 일본 남성사회의 '본심'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주목할 점은 지난 7년간 도쿄올림픽조직위 수장으로 군림해 온 모리라는 거물 정치인이 퇴장 당하기까지의 과정이다.
■해외 언론, 日 올드 보이즈 네트워크 집중 보도
결정적 변수 첫 번째는 영미권 유력 매체들은 발빠른 보도였다. 서구 사회에 비친 시선에 유독 민감한 일본의 특성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해외언론 보도가 없었더라면 이번에도 유야무야 지나쳤을 것이란 지적이 많다.
일본 국내 문제가 아닌 국제적 이슈로 전환된 것은 모리의 발언이 있은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뉴욕타임스는 모리의 발언(2월 3일) 직후 '도쿄올림픽 최고 회의에서 여성의 한계'라는 제목의 인터넷판 기사를 게재,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가 새로운 분노에 마주하게 됐다"며 "당시 여성 멸시 발언이 나올 때 아무도 그의 발언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에 경악했다"고 보도, 여론형성의 선봉에 나섰다. AP, AFP 등도 가세했다. 이들은 "사과는 하지만 사퇴는 하지 않겠다"며 버티기에 들어간 모리와 그의 뒷배가 되고 있는 일본 자민당 정권을 겨냥했다.
판이 완전히 기울어진 것은 도쿄올림픽 방영권을 가진 미국 NBC의 사임촉구 기사가 나가면서였다. 그제서야 "사과했으니 끝난 문제"라는 식으로 넘어가려고 했던 IOC도 태도를 180도 바꿨다. 이슈 발생 1주일 만이었다. "완전히 부적절하다"고 '뒷북 성명'을 내며 모리에 대한 손절에 나선 것이다.
선진국 가운데서도 유독 강한 일본의 '남성 무리 사회'의 특성, 다른 말로는 남성 엘리트 중심의 사회를 의미하는 '일본 올드 보이즈 네트워크' '일본 올드 보이즈 클럽'의 면모가 이 사건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났고, 이 역시 집중포화를 맞았다. IOC 캐나다 위원이자 여자 아이스하키 캐나다 대표로 올림픽에서 네 번이나 금메달을 목에 건 헤일리 위켄하이저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모리 회장에 대한 비판과 함께 '#올드 보이즈 클럽'이라고 태그를 달았다.
모리가 회장직에서 물러나겠다며 공식 절차를 밟지 않은 채 후임자로 자신과 친한, 말하자면 올드 보이 클럽의 멤버인 가와부치 사부로 일본축구협회 전 회장에게 맡기겠다고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결국엔 그가 공개 석상에서 "딸"이라고 불러온 하시모토 세이코가 조직위 새 수장에 앉았으니, 그 역시 광의에서는 올드 보이 클럽의 멤버로 입증된 것이다.
■SNS를 통한 폭발…82년 일본의 김지영 세대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은 지난 2018년 12월 일본에서 발매된 후 스테디셀러다. 도쿄 중심가 서점에서 여전히 '순위권'을 달리고 있다. 이번 사건에 앞서, 지난해 12월 일본의 인기 여배우 하세가와 교코(43)는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소설과 영화로 된 82년생 김지영을 모두 접했다며, 소속사 여성 직원 3명과 이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하세가와는 "여성으로서 아이를 키우는 주부로서, 생각할 거리가 정말 많았다. 소설 속 김지영이 30세에 결혼을 해 33세에 육아를 하는 모습이 자신과 같다"며 '슈퍼 캐리어 우먼'이 돼야 하는 현실에 '폭풍 공감'을 표했다.
일본 보수지 요미우리신문 계열 중앙공론은 '온나고도모(女子供)가 없는 나라'를 주제로 올해 신년호를 열었다. 온나고도모는 '남자가 아닌' 여자와 아이를 뜻하는 것으로, 하찮은 존재라는 뜻을 내포하기도 한다. "여자와 애들(온나고도모)은 입 다물어"라는 옛날 가부장적 남성들의 말로 잘 드러난 표현들이다. 성격차지수 153개국 중 121위인 현실을 빗대며 "일본은 여성 없이도 돌아가는 나라라는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변화에 압도적으로 느린 일본이 성차별 개선 문제에 있어서도 뒤처지고 있어 '성차별의 갈라파고스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모리의 발언이 한계치에 다다른 일본 여성들의 인내심에 불을 붙인 것이다. 즉, 성차별 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끌고 나온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또 다른 변화의 시작점일지 모른다는 지적이 나온다. '모리의 역설'인 셈이다.
분노의 출구는 트위터, 클럽 하우스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온라인 청원사이트가 중심이 됐다. 게이오대생인 노조 모모코(22)가 '#DontBeSilent(침묵하지 말라)'라는 이름의 온라인 서명운동을 시작, 15만명 이상이 이에 동참했다. 그는 BBC 등과 인터뷰에서 "과거의 일본에서는 이런 종류의 발언이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그냥 무시되고 가해자도 처벌받지 않았다"며 "언론에 하루이틀 정도 보도되는 게 다였고, 똑같은 일은 계속 반복됐다"고 지적했다.
■"아저씨들, 퇴장당하지 않으려면 귀를 가져라"
그리하여 모리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시모토 세이코 신임 도쿄올림픽조직위 회장은 현재 성평등증진팀을 신설하고, 여성 이사 증원에 적극 나서겠다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무심코, 또 지금까지처럼, 의식없이, 던졌을 모리 회장의 발언 하나가 '나비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도쿄대 세치야 마가쿠 교수는 최근 월간지 중앙공론에 "인권 감각을 시대와 세계에 맞추어 업데이트해 나가야 할 것"이라며 "차별하는 리더를 동정할 필요는 없다. 업데이트가 안 되는 사람은 지도자에서 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저씨들은' 모리처럼 레드카드를 받고, 꼴사납게 퇴장당하지 않으려면, 듣는 귀를 가져라. 모리 전 회장에서는 그 귀조차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시 그리하여, 일본은 바뀔 수 있을까.
최근 도쿄올림픽 관련 5자 회담이 열렸다. 하시모토 회장, 마루카와 다마요 일본 정부 올림픽담당상(장관),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 등 일본 측은 모두 여성으로 채워졌다. 이것이 과연 달라진 일본을 상징하는가. 마루카와는 올림픽담당상으로 이동하기 직전 한국의 여성가족부 장관에 해당하는 남녀공동참여담당상을 맡을 당시 '선택적 부부별성제도'에 반대해 달라며 일본 지방의회에 압력성 서한을 보냈던 인물이다. 가족 모두가 남편 성씨 하나로 통일한 현행 가족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하시모토도 직전 남녀공동참여담당상을 맡았으나, 선택적 부부별성제 추진에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했다. 고이케 지사는 모리 회장 발언 파문 내내 침묵을 지키다가 수일이 지나서야 그가 참여하는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뒷북을 쳤다. 그들은 과연 분별 있는 여성들인가. 올드 보이 네트워크에 들어간 고위직 여성들의 모습이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