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상
인천시 제물포구락부
1901년 외국인 사교장으로 지은 2층건물
대한제국의 치열했던 외교 역사현장 재현
인천시 제물포구락부
1901년 외국인 사교장으로 지은 2층건물
대한제국의 치열했던 외교 역사현장 재현
인천 문화와 정신의 중심이지만 생기를 잃은 구도심인 인천 중구. 그 속에서도 일본의 잔재로 여겨지며 방치됐던 인천제물포구락부(클럽)가 재탄생됐다. 생기를 잃은 구도심에 생명력과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원도심 활성화 사업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인천 제물포 개항장은 한국 근대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현장으로, 이 땅에 하늘이 열린 이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서양의 신문물이 전파됐던 곳이다. 1883년 인천항 개항 뒤 중구 개항장 일대는 인천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가장 번성한 곳 중 하나였다. 하지만 100년 가까이 인천의 중심이었던 이 일대는 1985년 인천시청이 남동구 구월동으로 이전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인천시는 개항장의 상징적 서사 공간인 제물포구락부(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17호)의 가치에 주목했다. 기존 근대문화유산의 보전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시설의 재단장과 다양한 역사 프로그램 연계 운영을 통해 골목, 동네, 마을의 문화적 도시재생을 위한 인천시 문화재 활용정책 제1호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근대문화 교류의 현장이었던 제물포구락부는 개항기 인천에 거주하던 미국·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 및 기타 외국인과 소수의 중국·일본인들이 친목을 돕는 사교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1년 지금의 자유공원 기슭에 지상 2층의 벽돌 건물로 지어졌다. 1914년 외국인 거주지역인 각국조계가 철폐되고 부인회관, 광복 후 시립박물관, 문화원 등 여러 용도로 사용돼온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흔히 제물포구락부를 당대 서양인들의 사교클럽으로만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이 발행한 '제물포 각국 조례지 회의록'을 살펴보면 제물포구락부는 친목 외에도 다양한 정보를 나누고 중요한 결정들을 논의했던 장소임을 알 수 있다. 제물포구락부는 '제물포정략'이라는 말이 유래될 만큼 열강들의 이권 다툼과 외교적 활동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곳이다. 외형적인 모습은 사교클럽이었지만 외교의 전초기지였던 셈이다. 특히 제물포구락부는 서양과 직접적으로 문화를 교류하려고 했던 대한제국의 의지가 담긴 곳이다. 당대 유명 인사들은 모두 제물포구락부에 모였을 정도로 외교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그 당시 복합 문화공간의 성격을 띠었던 곳이기도 하다.
인천시는 폐쇄공간(창고)이던 1층을 13년 만에 최초로 시민에게 개방해 전시공간, 콘텐츠 제작 스튜디오 및 재즈, 영상 음악 감상실로 운영했다. 2층 창문도 13년 만에 원형 복원(폐쇄→개방)해 120년 된 창틀을 통해 그 시대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한 정취를 연출하는 등 쉼터공간 조성 및 프로그램 재구성을 했다.
특히 개항장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의 도시재생 앵커 역할로 △근대문화유산의 역할 제고 △주민참여형 공간으로서의 가능성 확인 △포스트 팬데믹 서비스 검증 △제물포구락부 복합문화공간 조성 △다양한 지역상권 주민 및 컨소시엄 등 폭넓은 이해관계자와 협력체계 구축 △개항장 여행지 △공공시설 △소상공인과 파트너사 정보 미션 내 결합을 통해 관광 및 지역 경제활성화에 기여하며 문화적 복원의 성공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hoya0222@fnnews.com 김동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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