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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거품에 실물경제 회복 멀어… 더 고통스러운 인플레 [정상균의 깊이읽기]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9.18 18:55

수정 2022.09.18 18:55

스페셜 리포트
양적완화에서 긴축, 유동성의 역습
팬데믹 속 양산된 유동성 자산시장에 흡수, 산업·고용 투입 안돼
부의 불균형·양극화 심화… ‘약한 고리’ 신흥국 국가부도 직면도
우크라 사태에 달러강세 겹쳐 물가·금리·환율 ‘3高’ 악순환 심화
韓경제, 규제철폐·한미통화스와프 등 서둘러 펀더멘털 개선해야
자산거품에 실물경제 회복 멀어… 더 고통스러운 인플레 [정상균의 깊이읽기]
자산거품에 실물경제 회복 멀어… 더 고통스러운 인플레 [정상균의 깊이읽기]
극적인 변화의 순간에 서 있다. 양적완화(QE)에서 양적긴축(QT)으로의 대전환, 그 급변에 세계 경제는 발작 중이다. 2008년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은 유례없는 유동성을 양산했다. 돈은 부동산과 주식.가상자산과 같은 자산시장으로 밀려들었다. 거품은 빠르고 크게 일었다.
자산 가격은 급등했다. 유동성이 만든 자산거품에 실물경제는 회복되지 않았다. 우리가 직면하는 인플레이션이 더 고통스러운 이유다. 유동성의 역습이다.

■돈값의 추락… 광기의 시대

'빅쇼트'는 돈에 관한 인간의 착각과 거짓, 탐욕을 그린 영화다. 배경이 된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 경제는 충격에 빠졌다. 영화 속 헤지펀드 대표 스티브 카렐은 이런 말을 한다. "결국엔 일반 국민이 (유동성 폭증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늘 그래 왔으니까요". 실제 미국에서 800만명이 실직하고 600만명이 집을 잃었다.

그해 9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는 비전통적 통화정책 양적완화를 시작했다. 민간·기업에 돈을 전방위로 뿌리는 인위적 인플레이션이다.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세계 3대 경제권이 양적완화를 주도했다. '제로-마이너스 금리'의 유동성이 경제를 밀어올렸다. 2017년 가을 연준은 약간의 통화긴축으로 출구(2017년 10월~2019년 9월 연준 자산 6000억달러 축소)를 찾는 중 팬데믹이 터졌다. 2020년 3월 팬데믹부터 지난해까지 폭발적인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연준은 국채 5조7000억달러, 주택저당증권(MBS) 2조7000억달러어치를 사들였다. 신용평가사 피치는 "2020년 한 해 전 세계 양적완화 규모가 6조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했다. 6조달러는 2009~2018년 10년간 전 세계 양적완화의 절반을 넘는 규모다(이를 팬데믹머니라고도 한다).

팬데믹 속에 우리도 돈이 넘쳐났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 5년간 열 차례 추경을 했다. 두 차례의 전 국민 재난지원금으로 현금 24조원도 뿌렸다. 2차 지원금은 고작 1년 전 일(소득하위 88% 국민에게 지급, 4인가구 100만원)이다. 2017년 660조원이었던 국가채무는 올해 1069조원(국가채무비율 49.7%)에 이른다. 5년간 400조원 넘게 불어났다.

유동성은 인프라와 산업, 고용 등에 제대로 투입되지 못했다. 증시와 부동산, 가상자산이 빨아들였다. 시장은 과열됐다. '영끌''빚투'라는 신조어까지 만든 광기의 시대였다. 노동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세금으로 만든 일자리(노인 임시일자리)는 허약했다. 팬데믹 2년 전국 부동산 가격은 40% 이상 급등했다. 비트코인은 2000% 올랐다. 이렇게 가계부채(가계신용잔액)는 연간(2020~2021년) 100조원 이상 불어났다. 올 6월 말 기준 1869조원, 사상 최대다. 빈부의 양 끝은 더 벌어졌다. 계층 세대간 부의 불균형, 양극화가 더 커지는 'K-회복'이다.

■유동성의 역습… 무너지는 '약한 고리'

양적긴축은 고통이 따른다. 고통은 빨아들이는 돈의 양과 속도에 비례한다.

연준은 이달부터 매달 국채 600억달러, MBS 350억달러 등 950억달러(약 128조원)의 보유자산을 거둬들인다(시중의 돈을 흡수한다는 뜻).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는 "금융시장이 유동성 구멍에 빠질 것"이라고 했다. 연준 자산은 2021년 12월 말 기준 8조7190억달러(GDP 대비 38%). 막대한 유동성이 자본시장에 흘러들었다는 의미다.

유동성의 역습이다. 약한 고리부터 당한다. 달러가 부족한 신흥국들이 희생양이다. 에너지·식량 등의 필수재 수입물가는 치솟고 외채(달러 표시)가 불어나니 달러가 부족해진다. 자국 화폐가치 방어를 위해 금리는 계속 올려야 한다. 자산가치와 성장률은 더 하락한다. 악순환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신흥국들의 상반기 외환보유액이 3790억달러(약 509조원)나 줄었다"고 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가파른 외환 감소폭이다.

스리랑카, 잠비아는 국가부도 상태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도는 IMF 구제금융을 받는다. 터키 리라화는 올 들어 40% 이상 폭락했다. 박성욱 한국금융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은 "강달러가 계속되면 국가부도 상황에 직면하는 나라들이 속출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세계은행은 "신흥시장과 개발도상국 국민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물가·금리·환율의 악순환

물가와 금리는 저울의 두 추(錘)와 같다. 팬데믹과 원유·가스·곡물 등 자원부국(러시아·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저울의 균형을 깨뜨렸다. 유동성이 순기능을 다했다는 의미다. 원유·천연가스 가격이 뛰면서 사실상 모든 상품의 가격을 끌어올렸다. 유럽에선 천연가스 가격이 연초 대비 300% 이상 올랐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주요 생산국인 밀 가격도 40% 이상 급등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①인플레이션 피크=미국의 물가(소비자물가지수 CPI)는 6월 9.1%로 40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7월 8.5%, 9월 8.3%로 하락세이지만 피크아웃(정점 통과) 기대치에 못 미쳤다. CPI보다 중요하게 보는 근원CPI(에너지·식품 제외)는 6.3%로 전월보다 되레 올랐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지난달 잭슨홀 미팅에서 "가계·기업에 고통이 있더라도 물가가 잡힐 때까지 금리를 계속 올리겠다"고 발언한 배경이다. 이사벨 슈나벨 유럽중앙은행(ECB) 집행이사는 "유로존 인플레이션이 앞으로 수개월 안에 최소 10% 이상으로 치솟을 것"이라고 했다.

영국도 40년 만에 최고 수준의 인플레이션(7월 CPI 10.1%)을 겪고 있다. 내년 초 18%대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우리도 같은 패턴이다. 한국의 소비자물가는 7월 6.3%로 1998년 11월(6.8%) 이후 최고치였다. 8월 5.7%로 떨어졌으나 가중치 높은 석유제품 가격이 하락한 영향이다. 이를 제외한 근원물가 상승률은 7월 3.9%에서 8월 4.0%로 더 올랐다.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10월께 물가 정점"이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유가 등 대외변수와 직결돼 있어 불확실성이 크다.

②제로금리 종식=물가를 잡기 위해 연준은 두 차례 자이언트스텝(한번에 0.75%p 인상)을 단행했다. 사상 처음이다. 이렇게 5개월 새 기준금리를 0.25~0.50%에서 2.25∼2.50%로 인상했다. 한국은행도 지난해 8월 이후 1년 새 기준금리를 0.50%에서 2.50%로 2.00%p 올렸다. 이것도 잠시 한미 금리동조는 21일(현지시간) 깨진다. 이날 연준은 한꺼번에 1%p를 올리는 울트라스텝을 단행, 인플레이션 고삐를 더 죌 것이 확실시된다. 높은 금리로 흐르는 돈의 특성상 달러가 빠져나간다는 얘기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연준이 연말에 기준금리를 4%까지 올릴 수 있다"고 했다. 에너지 가격 폭등으로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유럽중앙은행(ECB)도 이달 초 사상 최초로 자이언트스텝을 단행, 7년간의 제로금리를 끝냈다.

연말 '3% 금리'를 시사한 한은도 고민이 커졌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한은은 연준으로부터 독립하지 않았다"고 했다. 연준의 스텝에 맞춰 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물경제가 허약할 때 금리인상은 고통이 더 크다.

③달러 패권=전쟁과 에너지 위기, 팬데믹에서 달러 수요는 폭발적이다. '지금의 강달러는 구조적 현상으로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의 공통된 분석이다.

콧대 높던 유로화는 20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1유로가 0.75~0.95달러까지 더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영국 파운드화도 16일 1.13달러대로 하락, 37년 만에 최저치다.

원화도 추락 중이다. 15일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2거래일 연속 장중 1399원까지 치솟았다. 2009년 3월 31일(1422원) 이후 최고다. 심리적 마지노선 달러당 1400원은 시간문제다. 무역적자 폭이 커지면 1500원대로 내려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원화가치 하락 요인은 복합적이다. △미국 초긴축과 자국 내재화 전략(반도체 등 핵심산업) △러·우크라 전쟁에 천연가스, 밀 등의 수입물가 급등 △한국의 최대 달러 수급원이던 반도체 수출 둔화(8월 7.8% 감소) △대중국 교역부진(올 5월부터 연속 적자)△무역적자 지속(올 4월부터 5개월 연속), 상품수지 적자전환 등 달러 수급불안 등이 한 고리로 얽혀 있다.

■고령화·연금고갈… 한국의 시한폭탄

우리 경제는 지난 2·4분기 실질GDP 성장률이 전분기 대비 0.7%에 그쳤다. 경상수지 흑자는 10억9000만달러(7월 기준)로 쪼그라들었다. 상품수지는 10년3개월 만에 적자(11억8000만달러)로 돌아섰다. 한은은 "8월에 경상수지가 적자로 전환될 수 있다"고 했다. 외환건전성이 약화되고 실물경제가 침체되면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 고물가)에 빠진다.

기업들의 부담도 가중된다. 금리가 1.75%p 인상되면 중소기업 이자부담은 10조원에 육박한다. KDB미래전략연구소는 "한계기업의 잠재적 부실이 현실화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해 말 한계기업(이자보상배율이 3년 연속 1 미만인 기업)은 4478개사(전체의 18.3%)로 2016년(2165개, 11.6%)보다 106% 급증했다는 게 근거다.

겹겹이 밀려드는 긴축의 위기가 한국 경제·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헤집는다. 부의 양극화는 깊고 단단해진다. 취약계층은 더 어려워진다. 1870조원 가계빚(6월 말 기준)이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다. 빠른 초고령화 진입이 연금고갈(2055~2057년)을 앞당긴다.

경제위기 때 국가(집권 정부)의 역량이 확인된다. "우리 경제의 펀드멘털(경제 기초체력)을 더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에 전문가들의 조언이 관통한다. 우선 기업 투자·수출 등 경제 역동성을 억누르는 규제철폐에 속도를 더 내야 한다. 잠재적 우량기업의 부실이 없도록 투자를 촉진하는 과감한 정책지원이 필요하다. 기업의 성장동력을 높여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재정정책은 명확해야 한다. 외환당국의 직간접 개입으론 역부족이다.
지난 5월 한미 정상이 약속한 대로 양국 간 긴밀한 통화협력체계(통화스와프 체결 등)를 서둘러 구축해야 한다.

skjung@fnnews.com 정상균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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