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공급망 협력체인 '칩4'(한국·미국·대만·일본)가 첫 본회의를 열고 오는 28일 미국 반도체보조금 신청 접수를 시작함에 따라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들의 대중 리스크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의 반도체 보조금을 받으면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이 적용돼, 중국 공장에 신규 투자와 생산 증대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일각에서는 인도 등을 탈출전략으로 거론하고 있는 가운데, 업계에선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보조금 수혜…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삼성·SK
25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 23일(현지시간) 지나 러몬도 상무부 장관은 워싱턴DC 내 조지타운대 강연에서 "내주 화요일(28일)부터 반도체지원법 보조금 신청을 받는다"고 밝혔다. 작년 8월 공표된 반도체지원법은 반도체 기업의 미국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반도체 생산 보조금(390억 달러)과 연구개발(R&D) 지원금(132억 달러) 등에 5년간 총 527억 달러의 예산을 편성했다.
이번에 신청을 받는 보조금은 미국 내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기업에 주는 생산 보조금 390억달러다. R&D 지원금은 수개월 내에 접수를 시작할 예정이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 테일러시에 170억달러(약 22조원)를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SK하이닉스도 150억달러(약 19조5000억원)를 투자해 첨단 패키징 공장과 R&D 센터를 짓겠다는 계획을 밝힌 상태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기업 중 미국에 반도체 공장 설립에 투자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보조금 수혜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이 보조금에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이 있다는 점이다.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미국 상무부와 향후 10년간 중국 등 미국 안보를 위협하는 우려국에 첨단 반도체 시설 신설과 기존 시설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협약을 체결해야 한다. 미국이 주는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받아 생산거점 확대에 나서야 하는 우리 기업들은 보조금을 받으면 중국과의 관계, 첨단 제품 생산, 설비 투자 등에서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어 진퇴양난에 빠진 셈이다.
가드레일 조항 세부 지침 공개 촉각
삼성전자는 현재 중국 시안에서 낸드플래시 전체 물량의 40%를 생산하고 있다. SK하이닉스도 우시 공장에서 D램 전체 생산량의 50%를, 다롄 공장에서는 낸드플래시 전체 생산량의 20%를 제조하고 있다.
미 상무부는 조만간 반도체지원법의 가드레일 조항 세부 지침들을 공개할 예정이다. 비메모리 반도체는 28㎚(나노미터)나 그 이전 세대로 규정했지만, 우리 기업들의 주력 제품인 낸드와 D램에는 규격을 명시한 바 없다. 업계에서는 지난해 10월 미 상무부가 발표한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 때와 비슷한 수준의 기준을 예상하고 있다. 당시 △핀펫 기술 등을 사용한 로직칩(16㎚ 내지 14㎚ 이하) △18㎚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의 수출을 사실상 금지했다.
보조금 지급에 상황이 급박해진 건 삼성전자다. SK하이닉스는 아직 투자 계획만 세워둔 반면 삼성전자는 텍사스에 170억달러(약 22조원) 규모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있다.
보조금 가드레일 조항이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 기준보다 강화되면, 최악의 경우 기존 생산하는 제품들에 소급적용까지 따져봐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구체적 사안이 발표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기존 제품들의 생산을 막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며 "우리 정부도 미국 정부와 세부 내용을 조율하고 있고, 중국 생산을 원천봉쇄하면 반도체 전체 공급망이 망가지기 때문에 미국도 극단적 선택은 피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中 철수 사실상 불가능… "외교 뒷받침돼야"
일각에서는 인도를 공급망 문제와 기술 탈취 등의 리스크를 안고 있는 중국을 대체할 국가로 꼽고 있다.
재계에선 삼성전자가 최근 인도에서 폴더블 스마트폰 초도 물량 생산하며 반도체 생산 시설 이전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중국 반도체 기업 5746곳이 등록을 취소했고, 폐업한 반도체 기업 수도 2020년 1387곳에서 2021년 3420곳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이미 수십조원을 투자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 철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 사업 차질에 대비해 대미 로비전에 총력을 기울여 온 것도 철수 불가설에 힘을 싣는다.
미국 정치감시단체인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지난해 삼성이 미국 연방정부와 의회에 집행한 로비 금액은 579만달러다. 이는 전년 372만달러 대비 55.6% 증가한 수준이다. SK하이닉스도 로비 금액으로 527만달러를 집행하며 전년 368만 달러 대비 43.2% 늘었다.
이에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중국 공장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 정부의 정교한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지원법 세부 지침이 나오더라도 이해 당자사들과 의견 수렴 기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우리 정부가 칩4를 적극 활용해 유예기간이 8개월 남은 대중 수출 통제 갱신과 반도체지원법 가드레일 조항에 대한 협상의 판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hoya0222@fnnews.com 김동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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