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은 민영화 기업을
전리품 다루듯 입맛대로
K디스카운트 모두의책임
전리품 다루듯 입맛대로
K디스카운트 모두의책임
이 말을 한 이는 포철 신화의 주인공 박태준 포스코 전 회장이다. 박정희 시대 정주영 현대 회장이 도로로 '산업화 대동맥'을 구축할 때 박태준은 철강이라는 '산업의 쌀'로 근대화의 기수가 됐다. 가난한 나라, 척박한 땅에서 쇳물이 터져나올 것이라고 기대한 해외 인사는 없었다. 자금줄을 못 찾고 막막함에 끌어다 쓴 돈이 대일청구권자금이다. 조상의 핏값이 헛되이 되면 영일만에 빠져 죽겠다고 한 이도 그였다. 황량한 포항 백사장에 거대한 제철소가 들어섰다. 그의 재임 말기 포스코의 조강능력은 세계 2위까지 올랐다.
용광로 구경조차 해본 적 없는 38명의 요원과 함께 이뤄낸 기적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린 건 공기업의 잔인한 운명이다. 계속될 것 같았던 박태준 신화는 신군부, 문민정부로 정권이 바뀌면서 무너진다. 외풍을 막으려고 뛰어든 정치는 그뿐 아니라 창업공신들까지 몰락의 길로 밀어넣었다.
문민정부의 포스코 개혁은 요란했다. 황경로 2대 회장은 6개월 만에 물러나고, 정명식 3대 회장도 1년을 못 버텼다. 그사이 박태준 사단은 사실상 전멸했다. 물갈이가 끝난 것이 관료 출신 김만제 회장(4대)에 이르러서다. 하지만 서서히 김대중 국민의 정부가 오고 있었다. 김만제 회장 역시 임기를 못 채우고 유상부 회장(5대)에게 넘겨준다.
유 회장 시절인 2000년 포스코는 정부가 지분 한푼도 갖지 않은 민영기업으로 거듭났다. 국민연금에만 5% 이상 지분을 허용했고, 광범위하게 지분이 팔려 소액주주가 75%에 달했다. 명실상부한 국민기업인데도 회장 수난사는 계속됐다. 뒤를 이은 이구택(6대), 정준양(7대), 권오준(8대) 회장이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옷을 벗었다. 주로 호텔 커피숍에서 누군가의 대리인이 차기 회장의 이름을 포스코 측에 불러주는 식이었다. 이것이 허허벌판 맨땅에서 기적을 일군 굴지의 기업을 대하는 정부의 방식이었다.
이제는 최정우 회장 차례다. 포스코 CEO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연말 차기 회장 선임절차를 시작했다. 기존 승계 카운슬을 손봐 전적으로 후추위가 이 작업을 주도하는 것으로 했으나 잡음은 끊이질 않는다. 최 회장은 문재인 정부 때 취임, 연임에 성공했고 3월 무사히 임기를 끝내는 것만으로도 기록적이다. 하지만 3연임 행보를 얼핏 보이면서 잔혹했던 과거 인선 기억까지 되살렸다.
"후추위의 공정성이 의심된다"는 국민연금 이사장의 즉흥 발언 이후 최 회장은 후보 명단에서 빠졌다. 그 뒤 후추위에 소속된 사외이사들의 호화 해외출장 스캔들이 터졌다. 최 회장과 관련 이사들은 지금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이런 후추위에 더 이상 인선을 맡길 수 없다는 측과 지금 와서 룰을 바꿀 수 없다는 측이 나뉜다. 완주 의지를 밝힌 후추위는 마지막 후보 리스트 공개를 앞두고 있다. 이들 중 뽑힐 최후의 1인을 두고 격렬한 주총 표대결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누가 되든 여진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민영화된 지 20년 넘은 기업이 이토록 주기적으로 겪는 인선소동이라니. 최 회장은 정부의 그 많았던 해외순방길 경제사절단에 단 한번도 낀 적이 없다. 경악스러운 행사이긴 했으나 기업 총수들이 만사 제치고 달려간 대통령 주재 부산 길거리 떡볶이 이벤트에도 못 갔다. 전임 권오준 회장도 문 정부 시절 마찬가지 수모를 겪었다. 외풍을 막을 체력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포스코 책임도 분명히 있다. 주주를 대신해 경영진을 견제해야 할 이사회의 안일함은 말할 것 없다. 발군의 실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이런 잘못 탓이 크다.
포스코를 전리품 다루듯 하지 마시라. 다른 소유분산 기업에도 마찬가지다. 나아가 기업 전체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정부의 전리품, 들러리 신세로 세계와 맹렬히 싸울 수 있는 기업은 없다. 필요 없다는데 바로 뒤에 서 있을 게 아니라 정작 필요할 때 손을 잡아주면 될 것이다. 그래야 힘이 덜 든다.
jins@fnnews.com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