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강남시선

[강남시선] 밸류업의 골든타임

윤경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7.14 19:13

수정 2024.07.14 19:13

윤경현 증권부장
윤경현 증권부장
"더는 국장(한국 증시)에 미련 없다. 미장(미국 증시)으로 이사 간다."

20년 가까이 주식투자를 해온 한 동학개미의 말이다. "전문가들의 조언을 따라 장기투자도 해보고, 각종 테마를 따라 단타도 해봤지만 해외 증시를 따라가지 못하는 국내 증시 상황에 지칠 대로 지쳤다"는 푸념이다. "남들 다 오를 때는 못 오르고, 위기 상황에는 남들보다 더 빠지는 한국 증시"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더해졌다.

실제로 올해 상반기 주요국의 증시 수익률을 보면 한국 증시는 '왕따'가 된 모양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열풍 속에 미국 나스닥지수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는 각각 19.1%, 14.8% 뛰었다. 일본 닛케이225지수도 18.4% 올랐다.
이에 반해 코스피지수 상승률은 5.6%에 그쳤고, 코스닥지수는 오히려 2.2% 하락했다.

수익률 측면에서 서학개미와 일학개미의 완승이다. '바이 코리아(Buy Korea)'는 고사하고, 개인투자자 사이에 '국장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사실 동학개미의 국장 탈출은 시작된 지 오래다. 국내 개인투자자들의 상반기 해외 증시 거래규모는 2058억달러로, 300조원에 육박한다. 같은 기간 국내 증시 거래액(약 3700조원)의 7.7%이다.

개인은 국내 증시를 떠받치는 투자주체 가운데 하나다. 개인이 중심인 코스닥시장은 외국인들조차 역동성과 성장 가능성을 높이 평가할 정도다. 그런데 개인이 시장을 떠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만 국내 증시에서 7조3935억원을 순매도, (상반기 기준) 역대 가장 많은 주식을 팔았다. 직전 순매도 최대치인 지난 2005년 상반기의 4조2129억원과 비교하면 75% 늘어난 수치다. 정부가 올해 초부터 '기업가치 향상'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큰 소리로 외쳤지만 '집토끼'도 지키지 못한 셈이다.

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바른길로 가고 있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무엇보다 밸류업이 자사주 매입·소각, 주주환원율 높이기 등으로 집중되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자칫 기업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주가를 끌어올리고 기업의 장기적 성장성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국내 상장사들은 대규모 설비투자를 필요로 하는 제조업 중심이다. 서비스업이나 금융산업이 강한 선진국에 비해 자기자본이익률(ROE)이 낮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증시 건전화를 위한 내부의 걸림돌도 이참에 걷어내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쪼개기 상장'이다. LG에너지솔루션, HD현대마린솔루션 등 자회사의 분할상장이 이뤄질 때마다 본질적인 기업가치는 그대로인데 주식 수만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난다.

상장 과정에서 고평가 문제도 있다. 벤처 투자자들은 기업공개(IPO)를 엑시트(투자금 회수)의 주요 수단으로 삼는다. 투자금 회수를 극대화하려면 기업가치를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 '뻥튀기 상장'이 나타나는 이유다. 그 결과 상장주식 수는 늘어나지만 이후 주가는 공모가를 밑도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지적한 것처럼 '좀비기업 퇴출'도 더욱 활성화돼야 한다. 상장 유지를 위해서는 시가총액, 자기자본, 매출액 등 여러 지표를 충족해야 하는데 각 항목의 수준이 신규 상장에 비해 매우 낮다. 2019~2023년 코스피·코스닥시장을 통틀어 447개사가 새로 증시에 입성한 반면, 상장폐지(스펙·자진상폐 제외)된 기업은 14%(64개)에 그쳤다. 전체 상장사 수를 감안하면 0.7%에 불과하다.

한국 증시의 밸류업을 위한 행보는 이미 시작됐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만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면 반은 그냥 반에 그칠 뿐이다. 한국 증시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넘어 '코리아 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도록 정부와 기업, 기관투자자 등 모든 주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골든타임'을 알리는 시계는 지금도 돌아가고 있다.

blue73@fnnews.com 윤경현 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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