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고봉으로 올린 기름밥 주고받으며 연대 쌓는 우즈벡 사람들 [인류학자 전경수의 세상 속으로]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7.22 18:09

수정 2024.07.22 19:44

나는 교환한다, 고로 존재한다(Muto, ergo sum)

인간관계는 ‘주고-받고-되갚기’ 연속
교환 부재는 존재 부정으로 이어져
오쉬티쉬로 손님맞는 우즈벡 사람
평등한 과정 속 공동체 의식 키워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오쉬티쉬'를 하는 모습. 주인이 손님의 입에 밥을 넣어준다. 전경수 교수 제공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오쉬티쉬'를 하는 모습. 주인이 손님의 입에 밥을 넣어준다. 전경수 교수 제공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데카르트 철학의 출발점이다. 고등학교 시절 그냥 외우기만 했던 것인데, 그것도 잘못된 구석이 있다. 생각만 하고 있으면 밥이 나오나. 친구가 오나. 일자리가 생기나. 그래서 "나는 교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Muto, ergo sum)"라는 말을 만들었다. 저 라틴어도 내가 만든 것이다.
친구의 딸이 혼인을 하니 부조금을 보내고, 우리집에 초상이 났으니 그 친구가 조의금을 들고 온다. 조상과 자손 간에도 주고받는 것이 있고, 부모 자식 간에도 주고받는 것이 있으며, 남녀 간에도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아이도 생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물리적인 거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는 마음이라도 주고받는다.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원수가 될 수도 있다. 주고-받고-되갚는 사이클이 지속되면서 인간관계가 지속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동체도 만들어진다. 북조선의 장마당 소식이 그곳의 사람 사는 질서를 말해주는 기준이 된다. 베트남의 '도이머이(개혁개방)'도 장마당으로부터 시작했다. 민중으로부터 불기 시작한 바람을 정권이 막을 수 없었다. 장마당이 탄압되는 이유를 알게 된다. 교환을 막는 것은 존재부정이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래서 '원수에게는 오물을' 보내는 모양이다. 불평등 관계 속에서는 선물이 비틀려서 뇌물로 변질된다. 사람은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교환해야 하며, 그러다 보면 교환을 위한 평화적 단골관계가 생기게 마련이다.

서태평양 뉴기니 남쪽의 트로브리안드에서 장기거주했던 브로니슬라브 말리노브스키가 발견한 '쿨라(kula)'가 불후의 사례다. 규모가 적은 섬들은 모든 물자를 자급자족할 수 없다. 개별적인 섬들은 각자 전문으로 제작하는 물품이 있고, 그것들을 교환하기 위하여 작심하고 원양 항해를 하였다. 규모가 있고 폼 나는 배의 제작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 개입하는 사회조직이 있게 마련이었다. 물물교환을 위한 항해 과정에 수반되어 혼인도 성사되었다. 단골들 사이에는 대를 물려서 교환하는 물건들이 있었고, 특별한 조개들로 만들어진 목걸이와 팔찌들이 해당되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사회적 교환이 있었다. '쿨라'에 북서태평양의 '포틀래취(potlach)'를 더해서 마르셀 모스가 '증여론'이란 책을 만들었다. 이론가인 모스는 실천가인 말리노브스키를 따라가지 못한다. 일차대전 도중 포로 신분으로 영국군의 거주제한 속에서 만들었던 말리노브스키의 민속지(ethnography)는 인류학이란 학문의 표본이 되기에 충분하다. 전쟁 중에 발견한 쿨라의 상징은 평화 만들기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사회적 교환이 전쟁 차단의 수단으로 작동하였음을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 "무토 에르고 숨"을 제창한다.

1990년 여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갔다. 소련의 붕괴 직전이라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이 걱정되어서 '김병화 꼴호즈'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일행은 우즈벡 가정에 초대되었고, 마당에 마련된 가마솥에서 양 한 마리가 삶아지고 있었다. 거창한 밥상이 차려졌고, 주인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사람들 앞에는 커다란 접시에 '오쉬(osh)'라는 밥이 담겼다. 러시아말로는 '쁠로브'이고, 고려인들은 그것을 '기름밥'이라고 이름하였다. 일단 쌀(인디카종)을 물에 삶았다가 건져낸 다음에 다시 양기름을 넣어서 본격적으로 밥을 하였다. 이 양기름은 특별한 부위다. 엉덩이에 약간 덜렁거리는 기름 주머니가 있다. 그것을 우즈벡 말로 '둠바'라고 한다. 쌀밥은 색깔이 노랗고 기름에 담갔다가 건진 것 같았다.

시장에서 파는 '둠바(양기름)'. 전경수 교수 제공
시장에서 파는 '둠바(양기름)'. 전경수 교수 제공

채로 썰어진 당근이 눈에 뜨이고, 군데군데 양고기 덩어리가 놓였다. 숟가락이 없으니 손으로 먹는 것임을 알았다. 주인이 솔선수범으로 먹는 준비를 하는데, 손바닥에 가득하게 밥을 올린다. 공기밥 하나 정도의 양은 넘는다. 나에게 입을 벌리라는 시늉을 한다. 다 받아먹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주인은 손을 떼지 않았다. 그 손에 붙은 밥알과 기름을 모조리 깨끗하게 먹어 주어야 한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핥고 빨아야 하는 과정이었다. 순서를 바꾸어서 다음은 내 차례였다. 손바닥에 고봉으로 쌓아 올려서 주인의 입으로 가져갔다. 주인은 내 손바닥을 그야말로 깨끗하게 처리하였다. 이 행위가 진행되는 동안에 좌석의 일동들은 응원을 하며 깔깔거린다. 돌아가면서 파트너를 지목하여 반복되는 행위였다.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밥이라는 선물을 '주고-받고-되갚는' 행위의 반복이었다. 친밀감을 넘어선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즈벡 사람들과 이렇게 기름밥을 주고받았고, 지금도 그 감촉이 남아서, 때때로 그 사람들 생각이 진하게 난다. 이 행위를 우즈벡 말로 '오쉬티쉬'라고 했다. 물론 이 자리에는 남자들만 모였고,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따로 오쉬티쉬를 한다. 무슬림 사회에서 결코 남녀가 섞일 수 없는 행위다. 찾아온 손님에 대한 우즈벡 사람들의 접대방식이다. 과거 오스만터키 제국의 강역에서 전해지는 풍습이라고 하였다. 자리가 파하고 돌아오는데, '구르트'를 한 보따리 준다. 소금을 많이 가미한 건조된 하얀색의 동그란 치즈다.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필수품으로 지참하는 것들 중 하나가 구르트라고 하였다. 우즈벡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우리네의 살림살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교환함으로써 존재가 확인된다. 교환은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일부인 사람은 다른 요소들과도 교환한다. 그것이 자연질서다. 먹이사슬을 피라미드 형태로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관점으로서, 제국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세계관의 표현이다. 사람을 만물의 영장 자리에 위치시켜 놓고, 자연을 지배하는 형태를 보여주는 인식의 표현이다. 그것은 세상을 거꾸로 돌리는 세계관이다. 죽은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서 동물과 곤충과 미생물의 밥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한 관계를 잘못 설정하게 되면, 세상은 어지럽게 돌아간다. 자연에 대해서 해롭게 한 결과로 기후변화라는 된서리를 맞고 있다. 힘자랑을 하는 순간에 인간관계는 지리멸렬이 되고 만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평등하게 주고-받고-되갚는 교환관계가 순리다. 그래야 살림살이가 편하고, 살림살이가 편해야 아이들이 나온다.
잔머리만 굴리지 말고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교환해야 한다.

고봉으로 올린 기름밥 주고받으며 연대 쌓는 우즈벡 사람들 [인류학자 전경수의 세상 속으로]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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