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을 만나다
2000.10.25 05:15
수정 : 2014.11.07 12:22기사원문
골프를 시작하고 1년이 채 안됐을 즈음으로 기억한다. 대한(大寒)이 막 지나고 혹한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친구가 퍼블릭코스라도 돌자고 전화가 왔다. 동트기 전인 오전 5시에 출발하자고 했다. 다들 겨울잠을 자는지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서 좀이 쑤시던 중이었다.
5시30분쯤이나 골프장에 도착했을까. 우리가 일착 인줄 알았는데 넓은 주차장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선배가 있었다. 클럽하우스의 출입문은 육중한 자물통으로 채워져 있었다. 사위가 죽은 듯이 고요하고 깜깜했다. 나뭇가지가 마치 귀신의 머리카락처럼 음산하게 떨고 있었다.
차안의 실내등을 밝히고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나누어 마셨다. 저만큼 밤바다에 섬처럼 떠있던 차안에도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클럽하우스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드디어 클럽하우스의 불이 들어왔다. 현관문이 딸각 열리는 소리가 100m 경주의 시작 총소리이기나 한 듯이 차안에 있던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나도 질새라 100m를 10초안에 끊을 기세로 달려갔다.
우리는 그곳에서 ‘골프에 미친 갱’을 만났다. 어렸을 적에 신문에 실린 사진에서 보았던 ‘검은 구월단’같은 테러범을 만난 것이다.
그 남자는 테러범으로써의 완벽한 복장을 갖췄다. 머리에서부터 목까지 검은 털실주머니를 뒤집어썼다. 눈이 있는 부분은 털실주머니에 구멍이 뚫려있었겠지만,색안경으로 눈마저 가렸으니 우리는 그 괴상한 물체가 사람인지,눈 코 입이 없는 괴물인지도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그 남자는 스키용 바지를 입었다. 눈 위에서 굴려 얼음구덩이에 묻어놓아도 체온에는 아무 영향이 없을 완전무결한 방한장비였다.
“좀 심하잖아? 아무리 퍼블릭이라지만 복장이 불량한 사람은 입장금지해야 하는거 아냐?”
“저게 골프채를 잡을 옷이니? 못 들어가게 했다가는 권총을 들이댈 것 같아서 무서워서 입장시켰을꺼야.”
우리는 너무 추워 이빨을 딱딱 마주치며 떨면서 그 남자를 흉봤다. 나는 복장의 예절도 중시하는 골퍼로서 반바지에 겨우 무릎까지 올라오는 양말을 신었을 뿐이었다.
세상의 온갖 차가운 바람은 모두 나를 향해 달려드는 것 같았다. 영하 10도의 차가운 공기 속에 하늘에서 내려오던 눈은 땅에 채 떨어지기 전에 바로 얼음이 되었다. 매운 바람은 얼굴과 다리에 사정없이 얼음가루를 뿌렸다. 차가운 바늘이 살갗을 콕콕 쪼는 것 같았다. 스윙은 경직되고,꽁꽁 얼은 공은 돌맹이처럼 딱딱했다. 잔디 밑에 숨어있는 얼음을 쇠징이 달린 신발로 딛을 때마다 나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 남자는 샷을 할 때를 빼놓고는 가죽장갑위에 벙어리 털장갑을 덧끼었고 손난로에 공을 비벼서 데웠다. 우리는 그늘집에 들러서야 간신히 더운 물 한 컵을 얻어 꽁꽁 얼은 공을 잠시 녹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한 라운드였다. 우리는 그날의 라운드로 볼의 실핏줄이 터져서 피부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지난해 가을에는 3홀을 돌기 전에 비가 쏟아져 라운드를 중지한 적이 있다. 동반자들은 그린피 환불이 안 된다는 말에 라운드 중지를 억울해했지만,내가 말렸다. 감기에 걸리면 치료비가 더 든다고 설득했다.
그런 내게 친구들은 골프에 대한 열의가 줄어들었다고 하고,나이가 들어 현명해졌다고도 한다. 또는 내가 늙었기 때문에 건강에 자신이 없어졌다고도 한다.
어쨌거나 골프에는 미쳐있었으나 부킹이 어려웠던 시절의 잊지 못할 추억이다.
/김영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