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속의 반란 ④

      2003.02.23 09:09   수정 : 2014.11.07 18:58기사원문

“여보세요.”

중년 여인 목소리다.

“에니카 여사님 바꿔주세요.”

강선우가 부탁한다.

“지금 이쪽에 안계시는데요.”

“그 쪽에 안계시면… 어디 있습니까?”

“크라쿠프자동차 공장으로 전화하세요.”

“공장 어디로 걸면 에니카 여사가 받죠?”

강선우가 묻자, 여자가 대답한다.

“부사장실로요.”

“부사장실?”

“오늘부터 부사장실로 출근하시거든요.”

“부사장실에서 뭘 담당하시죠?”

“부사장님이오.”

“부사장님?”

“신문 못 보셨어요? 에니카 여사가 부사장님으로 취임하셨다니까요.”

강선우가 김포공항에 내린 것은 이튿날 아침이다. 달수로 치면 두 달째이지만, 날짜로 계산하면 정확히 한 달 반만이다.
그러니까 한 달 반 전에 김판수 회장 수행비서로 임명되어 첫 해외 출장을 나섰던 강선우다.

한데 한 달 반 전의 강선우와 지금의 강선우는 너무나 다르다. 우선 지위가 그러하다. 만년 고참 대리에서 막 과장으로 억지 승진했지만, 기실 기분은 여전히 대리에 가까웠는데, 웬걸 지금은 보무도 당당한 부장이다.

대리와 부장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다. 등급으로 봐서는 세 계단이 고작이지만, 실제 상황으로는 대리의 눈높이에서 부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어찌보면 가장 화려하고 왕성한 인생의 황금시기를, 부장 자리에 오르기 위해 다 소진하는 것이 일반 샐러리맨의 숙명의 길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10년 가까운 세월을 고진감래해야 비로소 오를 수 있는 자리가 바로 부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강선우라고 해서 다람쥐 쳇바퀴 같은 그 숙명의 궤를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사원에서 대리까지 무려 6년이란 세월을 허송했다면, 거론 자체가 무색할 지경이다. 입사 6년이면 거게가 차장 승진 아니면 과장 말년쯤이 정상인데, 그때까지도 대리 꼬리를 떼지 못하고 있었으니, 강선우는 말 그대로 지진아 경지를 면치 못한 경우다.

그러나 세상만사는 공식대로 되지 않아서 재미있다. 누가 그랬는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지금의 강선우가 꼭 그런 경우다.

그래, 어느 누가 두 달도 채 안되어 부장으로 승진하여 금의환향하리라고 미처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래, 정확히 한 달 반만에 과장에서 부장으로 두 계급씩이나 뛰어오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어디 그 뿐인가. 한 달 반 동안 강선우가 몸으로 직접 체험한 모종의 사건 또한 얼마나 값지고 영광스러운가. 어쩌면 행운에서 행운으로 이어지는 흡사 고속열차의 질주 같은 쾌거라고 해야 옳다.

그레이스 최와의 우연한 만남이 그러하고, 5만달러의 사례금으로 구입한 알프레드 시슬레의 ‘루브시엔의 가을’이 그러하고, 노련한 조련사 에니카의 코치를 받아 갈리시아 위원장을 설복시킨, 믿어지지 않는 승리 따위가 그러하다.

또 있다. 지터버그 모텔 방에서의 그 일이다. 신기하게도 의식에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흔적이 여기저기 묻어 있는 그 격렬했던 정사 역시 쾌거의 일환이 아닐 수 없다. 상대가 누구라고 선명히 밝혀지지 않아서 더욱 그러하다.

강선우는 가슴을 한껏 편다. 그리고 보무도 당당히 공항 대합실을 빠져나온다. 아무도 출영나온 사람이 없다. 아니, 어느 누구도 강선우가 귀국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통보받았거나, 따로 접한 사람이 없다. 그래서 더 홀가분하고 자유스럽다. 하늘을 날아갈 것 같다.

두둑한 주머니를 생각하면 콜 택시를 잡아타고 싶었지만, 강선우는 공항버스를 이용한다. 그리고 동남호텔 정문 앞에서 버스를 내린다. 물론 동남호텔은 동남그룹사 소유다. 동남그룹이 경영하는 별 다섯 개짜리 특급호텔이다.

그래서 동남그룹 본사 빌딩과 인접해 있다.
엎드리면 코 닿을 정도는 아니지만, 한 블록만 건너면 동남 본사 빌딩이고, 특급 동남호텔이다.

그러니까, 거의 마주보고 있다고 해야 옳다.
강선우는 동남호텔의 전망 좋은 17층 특실을 체크인한다.

/백시종 작 박수룡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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