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힌 연못 ⑨

      2003.03.23 09:16   수정 : 2014.11.07 18:26기사원문

“그건, 당신에게 주어진 고유 임무야! 회장님께서 왜 당신에게 그처럼 중요한 임무를 맡겼겠어?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당신이 아니면 그 일을 해낼 수 없다고 믿고 계시기 때문에…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알겠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당신 선에서 끝내야 할 일이야. 아니, 당신 이외에는 아무도 이 일을 모르는 거야. 당신이 기획하고, 당신이 행동하고… 당신이 뒷마무리까지 하는… 그래서 누구에게도 이 일은 전가시킬 수 없는 사안이란 말이야.”

강선우가 또 한번 ‘알겠습니다’라고 반복했는데도 오종근 사장은 아직도 열기가 안 식은 듯이,

“강선우 부장!”

이라고 위엄있게 호칭한다.

“예, 사장님.”

“이제 화살은 우리 시위에서 떠났어. 이제부터는 모든 게 당신에게 달렸어. 당신이 시위를 어떻게 당기느냐에 따라 우리 운명이 결정된단 말이야. 당신이 얼마나 확고하게, 그리고 신중을 기해 명중시켜 주느냐에 따라, 회장님 운신의 폭이 넓어질 수도 있고 좁아질 수도 있어….”

“염려 마십쇼, 실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강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열렬히 다짐해 마지않는다.

정말 자신도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이다. 실제로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그동안 그 같은 비상식적인 지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옳은가, 나름대로 고뇌했던 회의감은 도대체 언제, 어디로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부끄러운 표현이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어떻게 한순간에 이처럼 극에서 극으로 추락할 수 있으며,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게까지 심약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줏대하고는 담싼 무기력한 남자 같다.


“강선우 부장!”

“예, 사장님.”

“당신이 믿음직스럽구만.”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그는 강선우가 옆에 있다면 어깨를 감싸고 등을 다독거려줄 것처럼 다정한 음정으로 말을 잇는다.

“참, 비용은 어때?”

“충분합니다, 사장님.”

“어려워 말고 언제든지 말만해, 비서를 시켜 금세 보내줄 테니까.”

전화를 끊고 나서도 강선우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

몸을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뭐라구. 오늘 밤 12시 45분 정전 신호와 함께 공장으로 전격 진입, 노동자 열 명쯤 묵사발을 만들어 놓으라구. 아니, 묵사발 정도가 아니야. 아예 철저히 찢어 놓으라고 강조했어.

더러 혼절도 하고, 더러 살려달라고 고함을 지르곤 하는 피투성이 노조원들을 병원으로 윙윙, 실어가고 노조 간부들이 달려오고….

이런 죽일 놈, 조국환, 네놈이 기어코 일을 저질렀어! 구사대랍시고 흉측한 깡패를 동원, 우리 노조원들에게 쇠파이프를 휘둘렀어! 우리는 절대로 좌시하지 않겠어!

조국환 널 기필코 물러나게 하고 말 거야! 너야말로 갈가리 찢어 늘어놓고 말겠어!

대충 그런 시나리오다. 영문 모르는 조국환이 울며겨자먹기로 어쩌는 수 없이 권좌에서 물러나자마자 기다렸단 듯이 김판수가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다.

동남그룹에 피치 못할 불행한 사태가 생기긴 했지만 이를 거울삼아 도리어 도약의 기회로 만들자고, 김판수가 열변을 토한다. 더구나 단 한명의 권고 사직도 시키지 않겠다는 김판수의 자신만만한 발표에 노동자들 모두가 환호하다 못해 숫제 김판수 만세를 합창하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김판수의 황금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김판수가 하는 일을 그토록 못마땅하게 여겨 사사건건 제동을 걸고 아예 뒤집어엎기 다반사여서, 누가 대표이사 회장인지 누가 부회장인지 가늠이 안되었던, 그 기고만장한 조국환이 포효하는 노조의 압력에 굴복해서인지 김판수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가만히 앉아서도 10년 체증이 내려가는지, 부처님 미소가 벙글벙글 돌고 또 돈다.


강선우 눈앞은 그런 김판수의 얼굴이 자꾸 가로막는다.

/백시종 작 박수룡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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