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의류 유통업 ‘동승아크’ 신세철 사장
2003.12.07 10:28
수정 : 2014.11.07 11:59기사원문
수중에 남은 돈은 기껏 60만원. 무엇을 시작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지난 81∼87년 6년간 뛰어든 의류제조업에서 참담한 패배를 기록했습니다. 의류 유통마인드로 제조업에 뛰어든 게 원인이지요. 가지고 있던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 빚만 3억여원을 지고 말았지요.”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기를 잃게 되는 법.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술과 도박, 여자로 점철되는 것을 우리는 익히 보아왔다.
신세철 사장(당시 39세)은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위기의 상황에서 오히려 투지를 불태웠다.
‘지난 75년 단돈 3000원을 가지고 서울로 진입, 직원을 300여명 부리는 등 한때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부를 일구지 않았던가.’ 그가 자신하는 근거는 바로 이같은 성공경험이었다.
신용 또한 만만치 않은 무형의 자산이었다. 신사장의 넉넉한 마음, 사업가적 배포는 시장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었다.
이뿐만 아니다. 비록 3평에 불과한 작은 가게지만 신평화상가 한구석에 엄존해 있었다. 빚쟁이들에게 양해를 얻고 자신의 소유로 한 가게였다. 재기의 발판은 이로써 충분했다.
88년 초 가게문을 열자마자 손님들이 몰려왔다. 도매상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자들로 가게 앞은 순식간에 북새통이 돼버렸다. 장사의 제1원칙인 ‘품질 좋고 값이 싼’ 의류를 외면할 소비자가 어디 있겠는가.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숨가쁘게 일했습니다. 돈 세기가 귀찮을 정도로 의류를 많이 팔았지요.”
이러한 호황에는 당시 88서울올림픽으로 경기가 달아오른 점도 한몫 거들었다. 신사장뿐만 아니라 당시 남대문·동대문시장 사람들은 이러한 호황을 만끽하고 있었다. 88년이 채 지나기 전에 그 많던 빚을 다 갚았다. 신사장의 신용과 자신감, 그리고 시류가 적절히 하모니를 이룬 결과였다. 이에 힘입어 89년에는 덕운상가 평화상가 등지에도 도산매장을 열었다. 돈도 그와 비례, 물밀듯이 들어왔다.
그가 소망하던 사옥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91년에 만들어졌다.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대지 100평, 건평 320평인 5층짜리 건물을 신축한 것이다. 제조업 실패에 대한 후유증은 이로써 완전히 사라졌다.
사옥에 입주한 그가 취한 첫번째 조치는 매장철수. 잘 나가는 도산매 가게를 처분하는데 주변의 불만이 많았다. 특히 아내의 반대가 심했다.
“규모가 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전국 도매상에 물건을 공급하는 소위 ‘왕도매’ 사업을 기획했지요.”
도매점이나 소매점이 이전처럼 재미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시장의 흐름을 파악한 것도 그가 매장을 철수한 이유라면 이유였다. 시장에 의류매장이 늘어나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90년대 들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상가건물로 가게당 매출은 나날이 떨어져갔다.
회사명은 동승아크로 정했다. 동승(童承)은 어린이를 섬기는 기업이란 뜻이다. 이같은 생각은 훗날 구체화됐다. 2000년부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네팔, 미얀마, 중국 등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의류를 무상으로 공급하고 있다.
저가인데다 어느 정도의 기획력이 가미된 동승의 제품은 도매상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십오륙년을 시장에서 오직 아동의류만 취급해 온 신사장의 안목이 빛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아동복 분야에서 동승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갔다. 매출규모는 나날이 늘어났다. 회사 규모도 덩달아 커졌다. 100억원, 200억원, 300억원 돌파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는 이에 기세가 등등, 본업이 아닌 제조업에 다시 뛰어드는 잘못을 저질렀다. 분야도 생소한 레이저프린터부품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성장가도를 달리던 신사장에게 갑자기 한파가 몰려왔다. 97년말 IMF외환위기가 닥친 것이다. 외형확대에 치중하던 신사장으로서는 절대 불리한 한파였다.
그는 고민했다. ‘주저앉느냐 돌파하느냐’는 상투적인 문구 속에서 그는 한동안 방황했다. 그를 이끈 것은 기독교 신앙. 하나님이 시련을 주셨다고 믿고 다시 용기를 냈다.
“제조업을 매각하는 등 사업구조조정을 단행했지요. 이때 다시는 제조업에 뛰어들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천직인 유통만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는 때를 기다렸다. 준비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것은 프랜차이즈사업. 5∼15세 주니어를 대상으로 한 ‘파이브앤업스’, 3∼7세인 토들러족을 겨냥한 ‘로라앤로리’ 브랜드로 다시 동승의 신화를 만들 각오를 되새겼다.
2000년 때맞춰 국내경기가 살아났고, 서민들 사이에서 창업붐이 일었다.
그는 즉각 서울 용두동을 비롯, 대구, 경주 등 전국에 걸쳐 9개 직영점을 열었다. 직영점을 통한 홍보효과를 노린 것이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예비창업자들만을 대상으로 2001년부터 가맹사업을 전개했다. 속도는 다소 늦지만 점포가 하나둘씩 늘어났다. 매년 20∼30개씩 늘어났다. 경기가 냉각된 요즘에도 월 2∼3개의 매장오픈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03년 12월 현재 파이브앤업스의 가맹점은 70여개, 로라앤로리는 30여개.
“프랜차이즈 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일 적정규모에 도달했습니다. 100개 정도의 점포는 아동의류분야에서 규모의 경제를 벌일만한 충분한 규모입니다. 이제부터는 속도를 가할 생각입니다.”
그는 속도에 대해 자신이 있다. 100% 반품시스템 구축, 1000여개 아이템확보 등 동승만의 가맹점을 위한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프랜차이즈 매장들이 기대한 만큼 매출이 오르고 있다는 점은 특히 고무적이다. 15평기준 점포당 월매출이 1500만원을 넘어선지 오래다.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3500억원 규모의 아동복시장 평정. 그의 사정권 안에는 당연히 이 분야 대기업인 이랜드가 있다. 그는 이랜드 사냥을 조만간 시작할 계획이다. (02)929-0100
� zhinoon@fnnews.com ?{정보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