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無爲’와 금융허브/이장규 금융부장

      2004.05.03 11:08   수정 : 2014.11.07 18:46기사원문

노자(老子)는 춘추시대인 기원전 500년께에 태어난 초나라 사람이다. 초나라는 중국의 문화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지역으로 베트남 등 남방에 가까운 곳이다. 이러한 지역적 특징으로 인해 노자는 동시대인인 공자와는 사뭇 다른 사상적 경향을 가졌다.

공자는 춘추전국시대 정국혼란의 원인을 인위적 질서 및 그 근간을 이루는 예법과 도덕의 붕괴에서 찾은데 비해, 노자는 오히려 인간들이 만든 예법과 도덕이 혼란을 불러왔다고 봤다. 대신 아무 것도 간섭하거나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자연에 맡기라고 주문한다.

노자에 대한 기록이 흔치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중국 고서중 그에 대한 묘사가 가장 잘돼 있다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노자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노자가 주나라 왕실 문서보관서에서 관리인으로 일할 당시 주나라를 방문한 공자가 노자에게 예(禮)에 관해 물었다.

이에 노자는 해답을 주는 대신 되레 공자의 위선을 질타했다고 한다.
인위적인 도덕과 예법, 법률이 백성을 구속한다며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연의 섭리를 따르라고 꾸짖었다.

예를 중시하는 공자는 그럼에도 노자가 용처럼 뛰어난 인물이라고 감복했다는 뒷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강함보다 부드러움, 유보다 무를 존중하는 노자의 사상은 예법과 도덕을 중시하는 공자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위(無爲)사상 또는 도가(道家)사상이라고 이름지어진 그의 철학은 집착과 욕심에 빠질 수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를 쉽게 깨닫게 해준다. 동서양의 최고 지성들이 사후 2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에게 매혹되는 것은 노자만이 가진 사색의 깊이와 독창성 때문일 것이다.

그의 사상은 노자가 늘그막에 서쪽으로 가면서 문지기에게 주었다는 도덕경을 통해 후세에 내려온다.

이정재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이 지난주 서울국제금융포럼에서 강연한 내용중 노자의 도덕경을 인용한 대목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위원장은 동북아 금융허브 추진과 관련한 향후 금융감독 정책방향에 대해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그릇이 비어 있음으로써/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있게 되며// 문을 내고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방이 텅 비어 있음으로써/ 방으로서의 쓰임이 있게된다”(도덕경 11장)는 알듯말듯한 말을 했다. 이자율 0.1%에 천문학적인 돈이 쏠려다니는 금융시장을 감독하는 수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에 더욱 파격적으로 들렸다.

더구나 그릇과 방이 만들어내는 빈 공간은 무엇을 뜻하는가. 속이 비어 있지 않은 그릇이나 내부가 다른 물체로 가득 차 있는 방을 상상해보면 ‘비어있음’이 가지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노자의 사상은 다른 말로 무(無)의 철학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무는 아무 것도 없음을 가리키는 절대적이고 존재론적 무라기보다는, 텅 비우는 것으로서의 무, 즉 억지로 함이 없는 무를 뜻하지 않을까.

이위원장이 말하는 빈 공간도 감독기능의 포기나 방관이 아니라, 무엇을 강제로 채우기 위해 무리하게 금융시장과 금융기관을 채근질하지는 않겠다는 의미가 아닌가싶다.

뒤이어 도덕경은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새는 법이 없다”(73장)며 자연의 섭리를 예찬했다. 마치 오늘날 금융 감독기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듯하다 .

이위원장이 밝혔듯이 참여정부의 핵심과제이자 서울국제금융포럼의 주제였던 동북아 금융허브 추진의 돛이 본격적으로 올려졌다.

일부에선 구체적 실행방안이 없다는 이유로 실현가능성을 의심하지만, 뉴욕이나 런던 같은 글로벌 경제중심은 힘들더라도 중동의 두바이나 독일 프랑크푸르트, 홍콩, 싱가포르 같은 지역허브로의 발전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의견이 적지않다.

허브란 말은 원래 자전거나 수레의 바퀴살이 모이는 중심부분을 말한다. 수레바퀴도 그릇·방과 마찬가지로 텅빈 구멍이 있어 그 가운데 축을 넣고 바퀴살을 얽어야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동북아의 바퀴축으로 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먼저 비우는 작업이 아닌가싶다. 속좁은 국수주의,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감정, 한탕주의과 더불어 사대주의, 천민자본주의도 비움의 대상이다.


억지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마음을 비우고 규제를 허물어 세상 사람들과 돈이 한국에서 물처럼 흐르도록 해야 한다. 채워져 있는 옛 것을 먼저 비우지 않으면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없다.
완전치는 않지만 문을 내고 창을 뚫어 힘겹게 만든 ‘미래를 위한 방’에 알찬 내용물을 채우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몫이다.


Hot 포토

많이 본 뉴스